강남학군 매력 퇴색 … ‘맹모’ 빠지니 전셋값 내림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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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길음동에 사는 직장인 김모(45)씨는 중학생 아들의 교육을 위해 당초 강남으로 잡았던 이사 계획을 포기했다. ‘8학군’보다 인근 혁신학교가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김씨는 “혁신학교 교육여건이 강남 못지 않은 것 같다”며 “비싼 전셋값 부담을 안고 강남에서 무리하게 공부시킬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신모씨는 요즘 “싼 전세물건이 있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게 일이다. 지난해 하반기 전셋값이 급등했을 때 비싸다며 발길을 돌렸던 손님들에게 전세물건을 권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신씨는 “매년 1~2월 월평균 10건씩 거래되던 전세가 올해는 통틀어 2건밖에 안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연초 전세시장을 주도하던 서울 강남권이 올해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좋은 교육여건을 찾아 강남으로 몰리던 학군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입시제도가 달라지고 지역 간 교육환경 차이가 좁혀지면서 강남권의 ‘교육 프리미엄’이 줄어든 것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아파트 전셋값은 1.1% 하락했다. 송파구(0.1%)와 서초구(0.4%)가 오르긴 했어도 예년보다 훨씬 낮은 상승률이다. 이들 강남 3구 전체로 보면 서울 평균 상승률(0.3%)에 못 미친다. 지난해 1~2월엔 강남 3구가 서울 평균(3%)을 훨씬 웃도는 3.6~3.9% 오르며 전셋값 상승세를 이끌었다.

 일부 단지는 큰 폭의 하락세까지 보이고 있다. 강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택의 하나인 도곡동 도곡렉슬 전용면적 85㎡형의 전셋값은 현재 6억2000만원으로 지난해 11월 7억원에 비해 8000만원 빠졌다.

 대치동 토마토공인 김성일 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인 1~2월 전세수요 대부분은 ‘맹모’인데 이들이 빠지면서 시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전세시장에서의 강남권 약세는 수능이 쉬워지고 내신반영률이 높아지면서 강남권 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싼 전셋값을 들여 강남권에서 공부한다고 대학 진학이 유리해지는 게 아니다.

 강남 3구의 비싼 전셋값도 높은 진입장벽이 됐다. 지난 2년 새 21~27% 올랐다. 상승률은 서울 평균과 비슷하지만 강남 3구의 아파트값이 비싸 상승폭은 훨씬 크다. 전세 수요자들이 선호하는 전용 85㎡형의 전셋값이 평균 7000만~8000만원가량 뛰었다.

 강남 3구 앞에서 발길을 돌린 학군 수요는 대신 강북과 수도권으로 흩어지고 있다. 정부 지원, 특성화 교육 등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와 혁신학교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현재 강북 지역에 자사고가 24개교(강남 3구 3곳) 있고 수도권 혁신학교는 123곳에 달한다.

 강북 지역에선 전세물건이 부족할 정도다. 성북구 종암동 부동산박사공인 이성군 사장은 “봄 결혼식을 앞두고 싼 전셋집을 찾는 신혼부부 외에 혁신학교 등의 학부모까지 겹쳐 전셋값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말했다.

 자사고와 혁신학교가 특정 지역에 몰려 있지 않고 골고루 분포돼 있어 전셋값 상승세는 지역별로 고른 편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강남 보합세-강북 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은행 안명숙 부동산팀장은 “경기 침체 등으로 구매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강남권 전세 수요는 움츠러들 것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강북 지역 등이 전세시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한 기자

혁신학교  지방자치단체 교육청이 낙후된 지역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정한 학교다. 한 학급당 학생 수가 25명 이내고 영어·예체능·과학 등 특화교육을 한다. 정부 지원을 받기 때문에 일반 학교 교육비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수준 높은 교육이 가능하다. 현재 전국에 초·중·고 323개교가 지정돼 운영되고 있고 이 중 경기도가 123개로 가장 많다. 올 3월 전국에서 142개교(경기도 34곳)가 추가로 지정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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