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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정치가 통계에 손대면 재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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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얼마 전 일본에서 본 도이 다케로(土居丈朗) 게이오대 교수는 뜬금없이 통계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일본 최고의 재정전문가다. 일본 재정이 나빠진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잃어버린 10년, 즉 성장 정체라기보다 인구 추계를 잘못했다. 특히 출생률 예측치를 잘못 잡은 게 결정적이다.” 일본은 5년마다 인구통계를 낸다. 하지만 5년 뒤 검증을 해보면 실제 출생률이 예측치보다 항상 낮았다. 사회적 충격을 의식해 전망치를 기계적으로 잡은 탓이다. 이런 오류가 몇 번 거듭되니 20~25년간 인구 구조가 완전히 뒤틀린 것이다. 결국 연금수입은 예상보다 적고, 연금지급은 훨씬 많아졌다. 도이 교수는 “고의적인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결국 잘못된 통계가 국가 재앙을 불렀다”고 했다.

 통계는 차가운 숫자의 나열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얼마 전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이 “4년 안에 도쿄 대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70%”라고 보도했다. 일본 열도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도쿄대 지진연구소는 오래전부터 “매그니튜드(M) 7 이상의 직하형(直下型) 지진이 30년 안에 발생할 가능성이 98%”라고 경고했다. 한 세대(30년)가 경험할 확률을 따지는 고전적 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에 비해 요미우리는 똑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4년 이내’로 바꿔 시산(試算)했을 뿐이다. 일반 시민에게 ‘30년 안에 98%’라는 경고는 먼 나라 이야기다. 반면 ‘4년 안에 70%’는 자신이 곧 당할지 모른다는 냉엄한 현실로 돌변한 것이다.

 요즘 도쿄에는 내진(耐震)구조를 보강하느라 야단이다. 특히 1960년대 고도성장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가옥들이 대상이다. 석면이 들어간 집은 대형 건설업체들이 해체를 꺼린다. 그 틈새를 불법 체류자를 고용한 야쿠자들이 달라붙어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싱글벙글이다. 예전 한신(阪神)대지진 때 희생자 6400여 명 가운데 80%가 낡은 주택에 깔려 숨졌다. 반면 내진설계가 의무화된 82년 이후의 주택은 87%가 M 7.2의 직하형 지진을 거뜬히 견뎌냈다. 요미우리신문이 부린 통계의 마법은 엄청나다. 정부가 아무리 경고해도 꿈쩍 않던 집주인들이 자기 돈으로 집을 고칠 정도다. 이처럼 통계는 잘만 다루면 그 힘이 엄청나다.

 과연 우리의 통계는 어떨까. 북한경제 통계만 보자. 지난해 11월 한국은행은 북한이 0.5%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무엇을 노린 경제 쇠퇴설인가”라며 발끈했다. 강성대국을 내세운 북한의 반발이야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의 민간 전문가들조차 “이명박 정부가 5·24조치 효과를 의식해 마사지한 느낌”이라며 고개를 돌린다. 이런 혼선은 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남짓하다는 추정치가 나왔다. 햇볕정책을 의식한 정부의 압박이 상당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민간 전문가는 “1000달러가 넘으면 왜 대북 퍼주기를 하느냐는 국내 반발을 의식한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러니 통계가 ‘믿거나 말거나’ 신세가 된 것이다.

 도이 교수는 “중요한 통계를 객관적으로 예측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치가와 관료가 간섭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중립적인 전문가 집단에 최종 결정권을 맡겨야 속도와 방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이 교수의 조언이 아득하게 들렸다. 우리 사회는 가계부채가 912조원을 넘고, 정치권의 복지공약에 5년간 300조원이 든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다. 남의 일로 여기는 분위기다. 오히려 새누리당은 “정당의 공약에 정부가 시비를 건다”며 비난하고, 민주통합당은 “적반하장이자 몰염치의 극치”라고 몰아세운다. 이대로 간다면 과연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도쿄에서 열심히 집을 고치는 선견지명에 무릎을 쳤다면, 서울에선 국민 돈으로 생색내는 정치권에 가슴을 쳤다. 어느 때보다 요미우리 같은 통계의 마법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