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는 뒀다 어디 쓰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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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38면

오래전 ‘이내’라는 블로거의 글에서 본 에피소드인데 대강의 내용이 이랬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는 차를 몰고 가는데 도로 한복판에 비둘기가 있었다. 비둘기는 아침 식사에 열중했는지 차가 가까이 오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타난 차에 당황한 비둘기가 빠른 걸음으로 허둥지둥 도로를 건너간다. 그 꼴을 보고 이내라는 분이 혀를 차며 했다는 말이 이랬다. “얘야, 대체 날개는 뒀다 어디에 쓰려고?”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나는 일본에서 3년 정도 산 적이 있다. 일본어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몇 년 살다 보니 외국어인 일본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일본 사람을 만나면, 또 그가 인내심을 발휘해준다면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처음 일본어를 접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말 가운데 하나가 말을 뜻하는 ‘고토바(言葉)’였다. 왜 말에 ‘잎 엽’을 붙였을까? 사람이 나무라면 말은 나무가 피워낸 잎이라는 걸까?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소리를 내는데 그게 꼭 나무의 말 같아서 그랬을까? 일본 사람들 은근히 시적이다.

또 인상적이었던 말은 ‘열심히’라는 뜻을 가진 ‘잇쇼켄메이(一所懸命)’ 혹은 ‘잇쇼우켄메이(一生懸命)’였다. 일본에서 내가 일했던 곳의 사장이나 동료는 자꾸만 내게 “일생 동안 한 분야에 목숨 걸고 일하라”고 격려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자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마음에 열 내어 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목이 두 개인 두목도 아닌 주제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사랑도 아니고 일에다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이 무슨 비장미이며 호들갑인가 하며 웃었지만 일본에 한 분야의 달인이 많고 또 대를 이어 내려오는 명가가 많은 것을 알고 나니 점점 그 말이 삼엄해졌다.

나는 말할 때 우리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영어 단어로, 그것도 남발하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또 외국에서 공부했거나 몇 년 살다 온 것을 갖고 무슨 말만 하면 그 나라 이야기를 들먹이는 사람 역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사람은 꼴불견이다. 그런데 내가 꼭 그렇다. 일본에서 3년 살았다고, 일본어를 조금 한다고 그것도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고작 생계형 일본어를 하는 주제에 일본이나 일본어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아는 체를 한다. “내가 일본에 살 때는 말이야” “일본어는 말이지” 하면서 아주 꼴값을 떠는 것이다.

내가 하도 꼴값을 떨고 다니니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다들 내가 일본인이나 재일동포인 줄 안다. 얼마 전 일본에서 한 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저쪽에서 일본어로 말하니까 당연히 전화를 받은 동료가 내게로 전화를 넘겼다. 물론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안다. 생계형 일본어이긴 하지만. 그러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일본어는 너무 유창하고 너무 빨라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쩔쩔매는 나를 사무실 동료들이 일제히 바라본다. 마치 도로 위 비둘기처럼 당황한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유창한 일본어 억양으로 이렇게 말한다. “뚜, 뚜, 뚜.”

옆자리 동료가 친절하게 무안을 준다. “부장님, 그냥 수화기 내려놓으시면 되잖아요.”
그러게. 날개는 뒀다 어디에 쓰려고.


김상득씨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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