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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산낙지 안먹겠다던 외국인, 시장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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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리뷰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com)에서 외국인이 꼽은 서울의 명물 1위는 뭘까. 경복궁? 인사동? 이태원?…. 의외로 한국인에게도 낯선 이름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즈’였다. 흔히 ‘온고(O’ngo·溫故)’라고 불리는 이곳은 원래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한식 컨설팅 회사였다.

‘온고’가 일반 관광객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된 건 2년 전 ‘한식 관광’을 시작하면서다. 외국인이 직접 어시장에서 산낙지회를 통째로 씹어보고 한밤중 인사동 거리에서 술자리 게임도 즐기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놀랍게도 이 한식 관광을 고안해 낸 장본인은 한때 한식 블로거로 유명했던 미국인 청년이다. 다섯 살 때 미국에 입양된 뒤 2005년 어머니의 나라를 다시 찾은 대니얼 그레이(33) 실장. 그는 자신을 낳은 한국의 음식문화를 자신을 키운 서구인의 시각으로 철저히 재조명했다. 그랬더니 한식이 훨씬 재미있어졌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노량진수산시장에서의 한때. 관광 가이드로서 대니얼 그레이의 가장 큰 장점은 친화력이다. 외국인들은 이 활달하고 살가운 청년에게 금세 마음을 활짝 열었다.

서울이 통째로 냉동고 같았던 지난 2월 9일. 냉랭하던 노량진수산시장이 돌연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침부터 외국인 ‘장바구니 부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싱가포르 등 국적과 나이가 제각각인 열 명의 여성이 축 늘어진 해파리며 ‘콤콤한’ 새우젓을 바짝 다가서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켜보던 상인이 버럭 외쳤다. “거, 사지도 않을 거면 물러서쇼!” 새우젓 조리법을 설명하던 대니얼 그레이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그는 일행에게 “한국인도 똑같이 혼나곤 한다”고 웃으면서 해명했다.

 이날 그레이는 서울에서 짧게는 이틀, 길게는 2~3년간 체류 중인 서울국제여성협회 외국인 회원들과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체험했다. 새벽 바다에서 건져올린 횟감이 펄떡대고 있었다. 장사꾼들은 목청껏 값을 불렀다. 친절한 ‘관광코스’는 아니었지만, 생생한 삶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가치가 있었다. ‘온고’의 다른 한식 관광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상품에 흔히 나오는 빤한 프로그램이 없다.

 그레이는 “한식 관광만큼 초점이 명확한 여행상품은 거의 없다”며 “흔한 단체관광만으로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따끔하게 꼬집었다.

Q 현재 한국 관광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A “한국은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 동대문시장을 판에 박힌 대형 쇼핑몰로 만들어놓고 왜 관광객을 몰아넣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외국인들은 종로 광장시장이나 북촌·홍대의 작은 디자인 숍을 선호한다. 단체관광 일색인 것도 문제다. 개인이 각자의 취향대로 한국을 즐길 만한 창구가 필요하다. 물론 그 전에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

Q ‘서비스의 질’이라면?

 A “한국의 식당은 대부분 세심한 서비스가 부족하다. ‘여기요’라고 부르기 전에 빈 물잔을 알아서 채워주는 식당이 거의 없다. 관광 가이드도 관광객이 식사할 동안 뒷짐만 지고 앉아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차려진 음식을 설명하면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서비스해야 한다. 양념·국물을 개인접시에 담아내는 건 기본이다. 나는 먹기 불편한 생선까지 깨끗하게 발라준다. 관광산업은 결국 서비스업이다. 다들 즐겁고 신나기 위해 여행을 한다.”

Q 어떻게 하면 관광이 재밌어지나?

 A “나는 ‘온고’의 한식관광을 ‘투어(Tour)’가 아닌 ‘체험(Experience)’이라고 소개한다. 여행은 매순간이 흥미로운 체험이어야 한다. ‘죽어도 산낙지 안 먹겠다’던 사람이 어시장을 둘러보고 나면 ‘재밌는데 한번 먹어볼까’로 바뀐다. 회에 얽힌 생활과 문화를 몸으로 부대끼며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외국인이 호기심을 품고 먼저 찾도록 동기 부여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문화적인 배경을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이 관건이다.”

 (그레이는 동기 부여의 또 다른 예를 들었다.) “‘온고’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프로그램이 ‘밤문화 체험’이다. 종로 일대 술집을 돌아보면서 막걸리도 마시지만 ‘고진감래주(苦盡甘來酒)’처럼 특이한 폭탄주에도 도전한다. ‘고진감래주’는 한때 대학가에서 유행한 폭탄주인데, 맥주·소주·콜라 맛이 차례로 느껴진다. 작명 유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고진감래)라고 하면 열이면 열 즐거워한다.”

 지난해부터 ‘온고’에는 보다 전문화된 ‘맞춤형 한식 관광’에 대한 요청이 부쩍 늘었다. 미슐랭 스타 셰프와 델타·루프트한자·캐세이퍼시픽·노스웨스트 등 10여 개 항공사의 기내식 개발 셰프들이 다녀갔다.

 해외 셰프들이 주목한 건 한식의 양념과 식재료. 그들은 사나흘 일정을 잡고 서울 근교 농원에서 장 담그기, 두부 만들기를 체험하고 요리강좌를 통해 한식의 원리를 깨우쳤다. 미슐랭 스타 셰프들은 포장마차에도 갔다. 그레이는 “셰프들이 닭발이며 고등어자반구이 같은 안주 그릇을 싹 비우더라”며 “한식에 대한 해외 셰프들의 호응이 심상치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한식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해외에서는 (한식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고 그는 일갈했다.

 “한국은 항상 ‘완제품’만 홍보한다. 김치만 알리다 보니 천일염이나 고춧가루는 해외에서 잘 모른다. 북미 칠리 일종인 ‘카옌페퍼’로 엉터리 김치를 담그는 미국인도 봤다. 게다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은 장인이 담근 진짜 장맛을 원한다. 한식에 대한 이런 열정을 현실적으로 붙잡아야 한다. 서둘러 한식의 기본 식재료와 조리법을 전파해야 한다.”

Q 한식을 통한 한류가 가능하다고 보나?

 A “어릴 적 입양된 뒤 기름진 미국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다. 열세 살 때는 아예 채식주의 선언까지 했다. 2005년 한국에 와서 한식을 배우면서는 차츰 몸이 가뿐해졌다. 나는 게딱지 비빔밥을 좋아하는데, 삶은 게살에 참기름·김가루를 섞은 밥맛이 꿀맛이다. 미국 친지들도 반응이 좋았다. 지금 미국인들의 입맛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다. 한식이 분명 먹혀들 것으로 본다. 갈비·잡채·김치 같은 음식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남은 건 이 맛 좋은 음식에 재미난 문화며 체험거리를 엮어내는 일이다. 그게 ‘온고’의 성공 비법이다. 한식 컨설팅·요리강좌·한식 관광이 한꺼번에 가능하지 않나. 한식을 토대로 세계 어디에도 없는 ‘명물’을 만들어야 한다. 단지 한식에만 기댈 게 아니다.”

●대니얼 그레이 1979년 한국 대구 출생.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2005년 생모를 찾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북 경주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첫 해를 보낸 뒤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작가를 꿈꾸던 중 2007년 자신의 블로그(seouleats.com)에 이태원 등지의 레스토랑 리뷰를 쓰며 파워 블로거로 알려졌다. 2010년 한식 컨설팅 회사 ‘온고푸드커뮤니케이션즈’에 입사해 최지아(43) 대표와 함께 한식 관광을 개척했다. 현재 한식 관광의 개발·가이드를 도맡고 있다. 한국의 생모와는 2008년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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