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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농협 1167곳 개혁 못하면 국민 돈 5조원 물거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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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농협이 다음 달 2일 새 옷을 입는다. 농협중앙회 아래 금융지주회사와 경제지주회사를 두기로 한 것이다. 개혁이 논의된 지 18년 만의 결실이다. 지금은 중앙회가 돈도 빌려주고, 예금도 받고, 농산물 유통도 했다. 그러나 금융을 통한 돈벌이만 하고, 농업 사업은 뒷전이었다. 새 농협의 출범은 ‘협동조합’의 원래 역할을 찾자는 취지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겉옷(조직체계)의 변화를 계기로 속을 바꿀 차례다.

1172개 대 10%. 농협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수치다. 1172곳은 농협중앙회가 운영하는 은행 지점 수다. 어떤 시중은행보다 많다. 10%는 농협이 전체 농산물 유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농업 하면 농협이 떠오르고, ‘농협이 농업을 쥐락펴락할 것 같다’는 건 편견이다. 농업협동조합은 그동안 협동조합이 아니었다. 금융사였다. 심지어 고객이자 주인인 조합원을 등치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첫걸음이 농협을 신용(금융)사업과 경제(농업 생산·유통·판매 지원)사업으로 나누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신·경 분리로 인해 일반 소비자가 농협중앙회 산하의 은행 점포를 이용하거나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농산물을 사는 것은 달라질 게 없다. 지역 농협에도 변화가 없다. 조합장은 계속 선거로 뽑고, 지역 농협에 예금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판매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다.

 신·경 분리로 변화가 있는 곳은 중앙회 조직이다. 신·경 분리는 ‘컨트롤 타워’의 형태를 바꿔 내용을 바꿔보자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우선 중앙회가 농협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체계에서 금융은 금융지주회사가, 경제사업은 경제지주회사가 각각 맡는다. 한 지붕(중앙회) 아래 있지만 독립적인 경영을 하는 게 목표다. 다만 경제지주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점을 감안해 당분간 중앙회가 사업을 주관하다 2017년 3월에 모든 경제사업을 옮기게 된다. 이때가 되면 중앙회는 지역 조합에 대한 경영 교육이나 지역 조합 여윳돈을 굴려주는 상호금융 역할 등만을 하게 된다.

 신·경 분리까지 18년의 과정은 멀고 험난했다. 농협 개혁이 지지부진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농협이 센지 내가 센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전국 1167개의 지역 조합은 지역 사회에 뿌리박고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조직이다. 개혁이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2008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가락시장을 방문해 “농협이 번 돈을 농민에게 돌려줘라. 농협이 돈 벌어서 사고나 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신·경 분리는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한창 힘이 있던 대통령 임기 초였다. 애초 2017년 분리를 준비하던 터였기 때문에 농협은 정부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부채비율 등 경영 건전성 요건을 단기간에 맞춰야 하는 필요도 있었다. 정부는 5조원을 농협에 지원키로 했다. 1조원은 정부가 보유한 공기업 지분을 농협 금융지주에 현물 출자하고, 4조원은 국민연금 등이 농협중앙회가 발행하는 농협금융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지원된다. 결국 5조원 모두 국민 세금과 국민이 낸 연금 보험료인 셈이다. 농협 개혁이 중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국민의 주머닛돈으로 형성된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농협이 확실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농협이 가야 할 길은 멀다. 당장은 5년 말미를 둔 경제지주를 제대로 만드는 게 목표다. 농림수산식품부는 현재 전체 농산물 생산의 10%인 농협의 계약 재배 물량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잡고 있다. 계약 재배를 하면 농산물 공급량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만큼 가격 급등락도 줄일 수 있다. 이게 농민에게도 이익이다. 농협이 대량의 물량을 확보하게 되면 대형 유통업체와 가격 협상에서 밀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김완배 교수는 “농민들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주는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게 첫째 개혁 방향”이라 고 말했다.

 더 큰 과제는 농협의 근간인 지역 조합의 개혁이다. 지금은 조합 수는 많지만, 규모가 작아 제대로 된 유통이나 판매를 하기 어렵다. 이 바람에 농협 조합끼리 싸우기까지 한다. 횡성 한우가 대표적이다. 횡성 지역의 축협은 ‘농협에서 파는 한우는 횡성 한우가 아니다’는 안내판을 내걸 정도다. 농협과 축협은 모두 중앙회 소속이다. 2008년엔 횡성 한우축제위원회가 농협의 암소 판매를 허용하자 횡성 축협이 축제에 불참하겠다고 나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역 조합의 영세성은 중앙회의 힘을 더 키웠다. 지역 조합의 자기자본은 평균 100억원이 안 되고, 예금 대비 대출 비율이 50% 이하인 곳도 적지 않다. 이러다 보니 중앙회가 지원하는 무이자 자금에 목을 맨다. 중앙회가 지역 조합에 지원하는 이 자금은 연 7조~9조원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이 돈은 중앙회장의 ‘통치 자금’이라 불리기도 한다. 농협은 올해부터 이 자금의 배정과 운영 현황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황의식 연구위원은 “ 지역 농협 수를 350~500개 수준으로 통폐합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고 말했다.

 2015년이 또 한 차례 고비다. 지금까지 지역 조합의 통폐합은 조합장 간 임기가 다른 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2015년 3월 동시 선거가 실시된다. 농협 개혁은 이제부터 본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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