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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또 다른 은서가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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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은서’는 기적의 이름이다. 희귀질환(만성 장폐색증후군)을 앓아온 일곱 살 은서는 장기 7개를 동시에 이식받았다. 우리 의료진의 기술과 가족의 결단, 그리고 장기를 준 꼬마 천사가 은서를 일으켜세웠다. 이식에 걸림돌이 됐던 법 규정도 손질될 것 같다.

 이제 기적은 계속될 것인가. 잠깐, 하나 빠진 게 있다. 돈이다. 은서 장기 이식에 든 수술비 등 진료비 가운데 건강보험 부담금을 제외한 본인 부담금은 1억1000만원. 형편이 어려운 은서네 가계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다행히도 어제 서울아산병원 재단에서 본인 부담금은 물론 향후 치료비까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은서가 수술받은 병원에 7년 전 같은 이름의 네 살 여자 아이가 입원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역시 희귀질환(선천성 담도폐쇄증)을 앓던 아이였다. 또 다른 은서의 사연은 당시 일부 언론에도 보도됐다.

 “지난 9월부터 급속히 진행된 간경변 때문에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의료진은 간 이식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진단했다.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간을 떼어주려 했지만 이번에는 4000만원이 넘는 수술비가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는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으려니 마음이 찢어진다’고 울먹였다.”(2005년 11월 17일자 국민일보)

 돈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와 가족이 어디 이들뿐이랴. 자녀가 소아암이나 희귀질환을 앓으면 웬만한 집도 기둥뿌리가 흔들린다. 수술비를 구하지 못한 부모의 입술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자폐아 가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폐 치료를 받다 보면 몇 년 안에 집 한 채 날리는 건 기본이라고 한다. 조기 치료를 잘하면 절반 가까이 완치된다는 얘기에 돈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자폐아를 맡길 기관도 마땅치 않다. 특수교육을 담당할 전문 교사 수도 부족하다. 엄마가 종일 매달려야 한다. 지원 인프라가 갖춰진 이국땅으로 아이를 보내거나 이민을 떠나기도 한다.

 지난달 자폐아 단체 홈페이지에 ‘너무 힘들어서 이민갈까 해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한국은 특수교육의 불모지” “IT 강국일지 몰라도 복지만큼은 후진국”이란 댓글이 이어졌다. 이민까지 고민하는 데는 사회의 인식 부족 탓이 크다. 그러나 국가가 좀 더 정책적 관심을 기울였다면 달라졌을 일이다. 자폐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뇌성마비처럼 더 심각한 경우도 많다.

 이렇게 숱한 ‘은서’들 앞에서 정치권의 복지 논쟁이 갖는 의미는 뭘까. 0~5세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의료, 군 장병 월급 인상, 청년고용할당제, 비정규직 임금 상향…. “복지 대한민국”을 외치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정책을 들여다봤다. 득표로 이어지지 않는 소수의 고통에 대해선 해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번 18대 국회에서 발의됐던 희귀난치질환 관련 법률은 1년 넘게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기자는 복지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복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태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이 수술비 때문에 생명을 위협받는 사회, 자폐아 가족에게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여야의 복지정책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보편적 복지’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깔아주자는 것이다. 속도의 문제일 뿐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데 동의한다. 다만 소수의 구체적인 아픔에도 귀를 기울이는 게, 생명의 안전띠부터 채워주려 애쓰는 게 진정한 복지 아닐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정치권은 득표를 위한 공약이 오히려 국가적 보호가 필요한 사각지대의 소외를 더 깊게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거창한 담론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할 곳이 어디인지 살펴야 한다.

 7년 전의 은서는 어떻게 됐을까. 병원 쪽에 물었지만 “오래된 일이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간 이식을 받았으면, 부디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