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금세 끝나버리는 ‘환상’의 50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8호 27면

지휘자 정명훈은 올리비에 메시앙(오른쪽)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작품을 많이 연주 녹음했다. [중앙포토]

문학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면, 그래서 뭇 작가들의 색깔과 깊이를 찾아 독서편력을 거듭한다면, 결국은 마주치게 되는 성벽이 하나 있다.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 몇 차례 시도를 했었지만 나는 끝내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남들은 그 불가적 죽음 연구 소설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평론가건 일반독자건 정공법으로 그 작품을 규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한 연구'는 이러저러한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식의 딱 떨어지는 설명 대신에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아예 공중으로 치솟아 버리는, 결국은 변죽만 울리다 마는 감상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 난공불락의 초절기교 복문장의 미로를 어떻게 쉬운 말로 수습하고 정리해 낼 수 있겠는가.

詩人의 음악 읽기 올리비에 메시앙 ‘아멘의 환상’

그런 음악이 있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들.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아주 ‘있어 보이는’ 메시앙의 음악에 매료된 이래 마치 박상륭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듣고 또 들어왔다. 음악은 언어적 해석의 영역이 아니므로 어떤 감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쇼팽의 야상곡을 듣듯이 즐길 수 있는 음악세계가 아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최소한의 이해는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에 낸 책에서 나는 제법 길게 메시앙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내가 썼던 내용은 그의 음악세계가 아니었다. 나치 수용소에 갇혀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작곡하고 연주했다는 드라마틱한 생애적 사실에 살을 붙여 나가는 식이었다. 난감하고 설명할 길 없는, 그러나 매혹적인 메시앙.

최근에 구입한 음반 가운데 나이브사에서 나온 6장짜리 메시앙 추모음악제 실황음반이 있다. 그중 1943년 전쟁의 와중에 쓰인 ‘아멘의 환상’을 여러 날째 반복해 듣고 있다. 투랑갈릴라 교향곡,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하라위-사랑과 죽음의 노래 같은 주요 곡이 쏟아지던 시기의 작품이다. ‘아멘의 환상’은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7곡의 모음집이다. 한 사람은 중저음부를, 또 한 사람은 초고음부를 맡아 각각 따로 놀듯이 뚱땅뚱땅 두드려댄다. 이렇다 할 멜로디 라인은 없지만 인상적인 리듬감으로 전편을 이어간다. 메시앙의, 아니 많은 프랑스 작곡가가 그렇듯이 곡명이 매우 현란하게 붙어 있다. 1.창조의 아멘 2.별들과 테두리가 있는 혹성의 아멘 3.예수의 고민의 아멘 4.소망의 아멘 5.천사들, 성자들과 새들의 노래의 아멘 6.심판의 아멘 7.성취의 아멘.

나이브사에서 낸 6장짜리 메시앙 음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메시앙의 음악은 분명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많은 곡에 예수와 연관된 제목이 붙어 있고 이 곡 역시 ‘아멘의 환상’이다. 그런데 뭐랄까. 나는 메시앙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기독교 신앙을 연관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 난삽하고 파편적인 음열에 신성을 대입시켜 버리면 오히려 감흥이 깨져 버리니 말이다. 좀 무리한 연상을 해 보자면 오늘날 홀로그래피의 3차원 입체영상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세계, 그러니까 전쟁의 살육, 관능, 도발성 혹은 광기 따위를 음악화시켜 놓은 것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난해한 현대음악에서 유사한 연상을 할 수도 있겠는데 메시앙만이 보여주는 독자성이 있다. 그것은 특유의 완결감이다. 우연한 소리의 파편처럼 들리기 일쑤인 현대음악 속에서 메시앙은 어떤 전형성이나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
아름다운 음향의 조화와 질서에서 위안을 얻고자 한다면 메시앙 음악은 별로 권장할 일이 못 된다. 반면 내면에서 탐구적 열정이 솟구칠 때, 새로움이 필요할 때, 아울러 이성으로 충분치 않은 신비의 영역에 관심이 생길 때 메시앙 음악은 최상급의 반려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성당 오르가니스트로 60년이나 봉직한 작곡가의 종교 성향 곡에서 굳이 종교성을 배제하고 듣는 내 심사는 왜일까. 물신화의 극을 달리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종교와 예술을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한다. 하나는 클리셰와 동어반복으로, 다른 하나는 창조와 파괴의 세계로. 따라서 회화와 음악으로 표현되는 숱한 종교예술은 신성 또는 영성에 대한 도발이자 모독으로 볼 수도 있다. 언젠가 거론할 생각이지만 르네상스 음악에서 그 같은 도발성이 느껴질 때가 꽤 많다.

‘아멘의 환상’은 50분 남짓한 길이다. 그런데 항상 금세 끝나는 느낌이 든다. 작곡가의 역량 때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은 에너지를 의미하는데, 그렇다 그 ‘환상’의 50분은 내게 에너지로 온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