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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권 독파 ‘지독한 책벌레’ … 전세계 약자 위한 외교관 꿈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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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외국어고등학교 이건희(3년)군이 최근 방영된 ‘도전! 골든벨’에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00명의 청소년들이 50문제에 도전하는 퀴즈 프로그램으로 모든 문제를 맞춰야 골든벨을 울릴 수 있다. 이군은 이날 수차례 탈락 위기를 넘어 마지막 문제에 도전,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 특히 대회 중간에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불구하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 친구·후배·교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86대 골든벨 주인공이 된 이군은 보너스로 대학입학 등록금과 해외 연수비, LED TV를 받게 됐다.

충남외고 이건희군이 수 차례 탈락 위기를 넘어 ‘도전! 골든벨’에 참여한 100명 가운데 최후의 1인으로 남았다. [조영회 기자]

평소 읽은 책에서 힌트 얻어 위기 넘겨

“이것은 지난해 영국 과학자들이 완성한 최대 규모의 3D 우주지도입니다.…(중략) 도플러 효과에 의한 것으로 먼 곳에 있는 성운의 스펙트럼선이 파장이 약간 긴 쪽으로 몰려 있는 현상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마지막(50번) 문제를 받은 이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적색편이’라는 답을 적은 보드판을 두 손 높이 들어 올리자 학생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정답’을 외친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학생들이 이군에게 달려들었다. 마지막 문제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 만은 않았다. 41번 문제에서 이군에게 탈락의 위기가 찾아왔다. ‘상록수의 작가인 심훈이 어떤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심훈이라는 작가는 알고 있었지만 어떤 병에 걸려 사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도전자 100명 중 남은 인원은 모두 5명. 다들 오랫동안 긴장한 탓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군 역시 긴장한 나머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고 평소 읽었던 교과서 관련 책들을 떠올렸다. 그 중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 단어가 바로 ‘장티푸스’였다.

화장실서 책 읽다 잠 들어 버린 적도

이군은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실력 보다는 행운이었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사실 골든벨 등극은 이군의 말처럼 행운만은 아니었다. ‘지독한 책벌레’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책 읽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읽은 책만 무려 1000권에 이른다.

수업시간과 잠 자는 시간 외에 그의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사주시는 책은 밤 새워 읽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책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어 화장실까지 책을 들고 가면 한참을 앉아 있다 잠 들어 버린 적도 많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읽는데 몇 페이지가 끈적거려 펴지지 않았다. 억지로 뜯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하고 넘기자니 내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이군은 몇 장을 읽기 위해 시내 서점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군은 누구보다 책과 신문을 사랑하는 학생이다. 학교 아침 독서시간엔 신문을 꼭 챙겨봤다. 헤드라인 기사를 읽은 후 관심 있는 기사는 정독했다. 쉬는시간과 점심시간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책 속 이야기에 빠져 살았다.

 이군은 관심사가 생기면 관련 서적을 모두 찾아 읽는 등 책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뇌 관련 과학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객관화시키려 노력했다. 한국지리를 배울 때는 지도를 다룬 책을 여러 권 읽어 교과 공부를 폭넓게 이해하려고 애쓰는 등 교과 관련 참고서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미래 비전 이루기 위해 충남외고 선택

이건희군이 사회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이군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식당에서 일했다. 밤낮 없이 일하면서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아낌 없이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이군은 중학교 시절 식당에서 만난 손님 때문에 미래의 목표를 정했다. 하교 후 어머니와 식당에 있다 보니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공사장 인부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어느 날 일용직 근로자가 다리에 석고 붕대를 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이군과 어머니에게 “잠깐이라도 쉬면 생활이 어려워져 일을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주일 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무리하게 일하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군은 살기 위해 일하다 죽음을 맞는다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군은 책을 많이 읽고 영어실력을 쌓아 소외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국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이군은 외교관이 되려면 영어공부와 타국 문화의 이해가 필수라고 생각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충남외고를 선택했다.

 이군은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가며 일하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며 “부모님처럼 힘들게 사시는 서민들을 위해 꿈을 꼭 이뤄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실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글=강태우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이건희군 추천 도서

1.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2.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3. 착각하는 뇌(이케가야 유지)

4.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혼다 시케치카)

5.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시오노 나나미)

6. 료마가 간다(시바 료타로)

7.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살림 출판사)

8. 이야기 일본사(김희영)

9. 세속의 철학자들(로버트 L. 하일브로너)

10. 영화처럼(가네시로 가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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