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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80년대, 판타지로 되돌아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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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원더보이』의 주인공은 “고통과 공감하는 능력이 있으니 작가가 되라”는 권유를 받는다. 김연수는 “직업적 자부심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치 수학 문제를 받아든 듯했다. 해법 공식도 알고, 이미 풀어봤던 유형인데 정답이 ②번인지 ③번인지 헷갈리는 그런 문제. 출제자는 소설가 김연수(42). 1993년 등단 이후 웬만한 문학상은 다 받은 작가. 김연수라면, 익숙한 출제자다.

 그런데 영 모르겠다. 그가 4년 만에 펴낸 장편 『원더보이』(문학동네)는 기존의 김연수식 소설 문법에선 몇 발짝 떨어져 있다. 서정과 서사가 적절히 포개진 모양새야 낯익지만, 판타지까지 끼어든 서술 방식은 이례적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독심술(讀心術)에 서사를 적잖게 내맡기고 있다. 이런 초능력이 끼어들면, 이야기야 쉽게 풀리겠지만, 독자로선 아무래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작가의 해명은 이랬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진정한 소통이란 결국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초능력을 지니고, 또 초능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던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이번 소설을 통해 출제한 문제는 소통이란 말로 요약된다. 그 문제를 ‘소통의 수학’이라 부르자. 신작 『원더보이』에서 도출되는 공식은 이와 같다.

 #판타지+판타지=현실

 소설의 배경은 1984년부터 87년까지다. 주인공은 열다섯 소년 김정훈. 행상을 하는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귀가하던 날, 불현듯 교통사고를 당한다.

마침 상대편 차량에 무장 간첩이 타고 있던 바람에, 사고로 죽은 아버지는 ‘구국 영웅’으로 떠오른다. 고아가 된 소년은 사고 이후 남의 마음을 읽어내는 초능력이 생긴다. 정보부 ‘권 대령’은 그의 독심술을 고문에 활용한다. 소년은 말한다. “고문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고문당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지금의 상식으로 보자면, 80년대는 비현실적인 시대였다. 소설은 그런 비상식의 시대를 살았던 한 소년의 성장기다. 소년이 가진 초능력은 판타지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80년대의 현실이란 게 초능력보다 더한 판타지 아니었을까. 한국 사회는 그 잔인한 판타지를 겨우 통과해 지금에 이르렀고. 작가의 설명이다.

 “80년대는 무엇보다 고통의 시대였다. 80년대를 겪은 세대와 지금 세대는 소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물론 80년대의 정치적 의미에 큰 비중을 둔 건 아니다. 고문도 분신도 그 시절의 일상이었으니까. 다만 지금 세대에게 그래도 세상은 조금은 나아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1970년생인) 내가 겪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 것 뿐이다.”

 #슬픔+슬픔=위로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위로의 능력에 있다. 소년은 운동권 학생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80년대의 한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간다. 특히 ‘강토 형(희선)’과의 만남은 주목할 장면이다.

강토 형은 사랑하는 이를 80년대에 빼앗기고 남장 행세를 하는 여성이다. 고아가 돼 세상을 떠도는 소년은 희선의 슬픔을 만나 연민의 감정에 빠져든다. 소년의 고백이다. “두 개의 슬픔이 합쳐졌으니, 고통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순간 나는 위로받았다.” (159쪽)

 이 소설에는 80년대를 살아온 개인들의 고통과 슬픔이 담겨있다. 그 슬픔을 알아보는 건 독심술 따위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년은 희선의 슬픔을 알아본 뒤 초능력을 잃어간다.

 소년이 ‘재진 아저씨’라 부르는 사회과학 출판사 대표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바보는 자기가 아는 것만을 읽고, 모범생은 자기가 모르는 것까지 읽는다. 천재는 저자가 쓰지 않은 글까지 읽는다.” (233쪽) 천재 독자는 아니겠으나, 이 소설의 ‘저자가 쓰지 않은 글’ 에는 이런 구절도 있지 않을까 싶다. 슬픔이 슬픔을 알아볼 때, 인간의 소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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