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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경제 가치와 사람 가치가 충돌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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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영욱
논설위원·경제전문기자

정치인들에게 내는 퀴즈다. 호화유람선이 난파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선장은 구명보트에 사람들을 태웠다. 이때 개 한 마리가 뛰어들어 비좁은 자리를 차지했다. 언젠가, 어디선가 들은 영화 얘기다. 이제 질문이다. 사람이 탈 자리를 빼앗은 이 개를 어떻게 할까. 요즘 분위기라면 답은 뻔할 거다. 개를 밀어내고 대신 사람을 태우자고. 영화 속 선장은 달랐다. 사람을 더 실으라는 승객들의 아우성을 뒤로한 채 선장은 ‘고’를 명했다. “사람을 먹을 수는 없지요”라면서. 망망대해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표류할지 모르는 터. 이런 판에 식량을 걱정한 선장을 ‘사람’ 운운하며 탓할 수 있을까. 사람이냐, 개냐의 윤리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선장의 ‘경제’도 못지않게 중요하지 싶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요즘 정치판 때문이다. 사람 운운하며 경제를 깡그리 무시하는 듯해서다. 여야, 다 한통속이다. 심지어 민주당은 이걸 공천 심사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경제 가치와 사람의 가치가 충돌할 경우 어떤 선택을 할지” 물어보겠단다. 강철규 위원장은 이미 정답도 내놨다. “경제가 인권에 우선한다는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하긴 새누리당이 원하는 답도 마찬가지일 게다. 경제 민주화와 재벌개혁을 강조하는 게 민주당 판박이라서다. 하지만 경제와 사람의 가치를 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경제는 빵의 문제다. 먹고사는 문제를 사람의 가치가 아니라며 내팽개치는 형국이라서다. 백보 양보해 ‘표(票)퓰리즘’에 죽고 사는 정치인이 했다면 그나마 이해되겠지만, 경제학자 강철규씨가 할 얘기는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도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눈부신 경제성장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잘릴 걱정 없이 평생 일하고 임금도 더 많이 받는 세상,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없는 세상을 진실로 원한다. 재벌의 모리배 관행도 사라지고 중소기업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세상은 절대로 거저 오지 않는다. 사람 운운하며 경제를 무시하는 나라, 뜨거운 가슴만 있고 냉철한 머리가 없는 나라는 더욱 그렇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노무현 정부 때를 돌아보면 알 일이다. 그때도 부자 때리기가 일상사였다. 그래서 얻은 교훈은? 부자가 지갑을 풀어야 경제가 돌아가고, 부자가 있어야 창의와 활력이 돈다는 것이었다. 재벌이 아무리 미워도 개혁과 청산 대상으로만 삼아선 안 된다는 교훈도 그때 얻었다. 재벌 때리기는 기업 할 의욕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러면 아무리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어도 기업 투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5년 내내 경제가 골골하고 일자리 타령이 입에 달렸던 이유다.

 우리는 그리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5위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35위에 불과하다. 미국과 유럽이 재채기하면 감기 걸리고, 세계 경제가 조금만 흔들려도 외환위기의 불안에 떠는 나라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중국 눈치 보며 사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잠재성장률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고, 경제성장률은 그런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망망대해 속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살아남을까? 나라의 덩치를 더 키우는 것이다. 지금의 독일 정도가 되면 딱 좋겠다. 세계 4~5위권 규모가 되면 미국과 유럽이 설령 감기에 걸려도 끄떡없다. 외환위기의 불안에 떨 이유도, 중국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아직은 분배나 복지보다 성장에, 사람보다 경제에 주력해야 하는 까닭이다.

고른 분배와 함께 더디 가면 어떠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세계화의 노도가 늦게 가는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몰라서 하는 허언(虛言)이다. 앞서지 못하면 몇 걸음 처지는 게 아니라 아예 대열에서 탈락하고 마는 세상이다. 미국의 석학으로 꼽히는 존 미어샤이머 교수가 “한국민에겐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한 배경이다. 이런 살벌한 생존 원리 앞에서 ‘경제보다 사람을’ 외치는 정치권이 참으로 걱정이다. ‘사람보다 경제를’ 원하는 정당은 어디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