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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침투조 두 명 더 있었고 생포 후 간첩 만들어 북에 보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6호 01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을 하러 왔다 생포된 김신조씨. 중앙일보는 이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968년 1·21사태가 발생한 지 44년만에 당시 정부 발표와는 전혀 다른 증언이 나왔다. ‘북한군 124군 특수부대 게릴라 31명 중 김신조만 생포되고 30명은 사살됐다’는 게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이다.

68년 ‘1·21 청와대 습격’ 미스터리

새 증언은 충격적이다. ▶침투조가 31명이 아닌 33명이었으며 ▶그중 두 명이 ‘참수(斬首·목 자르기) 협박’을 받고 남한 고정 간첩이 됐고 ▶이들은 ‘김일성에게 접근할 만큼 출세하라’는 지시를 받고 북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각각 북한군 상장(중장)과 중장(소장)으로 진급했지만 98년 신분이 드러나 사형됐다는 것이다.

이는 124군 부대의 후신인 711부대에서 5년 이상 근무한 북한군 상좌(대령)급 출신 탈북자 홍은택(57·가명)씨가 제기했다. 홍씨는 지난해 12월 본지에 이렇게 주장한 뒤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도 이를 거듭 강조했다. 본지는 그의 증언을 추적했다. 그 결과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증언과 증거들이 나타났다.

68년 1월 25일 오후 2시, 경기도 송추의 송추국민학교. 습격에 실패한 124군 부대를 추격하는 군 작전이 한창인 가운데 사살된 게릴라의 시신 13구를 생포된 김신조가 공개 확인하는 절차가 진행됐다. 군인에 둘러싸여 검은 바지, 검은 농구화를 신고 수갑을 등 뒤로 찬 김은 시체를 보며 이름과 나이·계급을 말하다 갑자기 한 시체를 외면했다. 중앙일보 1월 26일자 3면의 관련 기사에는 “김은 머리 없는 마지막 시체 앞에서 고개를 획 돌렸다.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돼 있다. 26분 만에 확인이 끝났고 ‘목 없는 시체 1구’라는 표현은 시체 명단, 사진과 함께 중앙일보를 비롯한 당시 언론에 실렸다.

본지는 나라기록관에서 더 분명한 당시 현장 사진을 찾아냈다. 당일 현장을 찍은 ‘CET0031039’를 자세히 보면 10여 구 가운데 아래에서 다섯째는 다른 이와 달리 얼굴 자리에 둘둘 말린 헝겊 더미가 놓여 있다(4면 사진 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1월 26일 남양주 성락교회 시설에서 만난 김신조씨는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장갑차에 얻어맞았는지 (머리가) 없어졌어. 완전히 박살 난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의문은 참혹한 사진 CET0031040 (4면 사진 ②)이 상당히 해소해 준다. 들것 위 온전한 시체의 머리 옆에 놓인 이상한 형체. 확대하면 잘린 머리임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아무 설명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잘린 머리가 남북 정보사의 한 장으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게 홍은택씨의 증언이다.

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의 출발은 남파 게릴라와 탈출자의 수를 둘러싼 의문에서 시작된다. 당시 정부는 31명 남파, 김신조만 생포, 30명 사살로 발표했다.
홍씨는 “내가 입대한 부대에서는 33명 남파, 2명 탈출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70년대에 입대한 홍씨는 711부대(124군 부대가 이름만 바꾼 부대) 8대대에 배치됐다. 대대는 곧바로 ‘33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그 가운데 두 명이 탈출했다’는 부대 역사를 강의했다. 또 “두 명은 임태영과 우명훈이었는데 임은 내 부대인 8대대 대대장(소좌)이었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남파된 게 33명이란 얘기를 언제 들었나.
“황해남도 삼천군 수장리 8대대에서 그렇게 들었다. 우리가 33인조라 할 때는 청와대 습격조뿐이다. 임태영도 그렇게 말했다. 간부들끼리 ‘달기다리(권총) 하나에 빤츠 바람으로 (임태영이) 임진강을 넘던 자세로 하면 못할 게 뭐 있겠는가’라고 농을 했다. 31인조나 김신조라는 이름은 서울서 처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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