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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지난 줄거리>

서기 1231년 몽골 기마군단이 세계적인 문명국 고려를 침략한다. 이듬해 고려 조정은 수도 개경과 본토를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는데 대구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고려대장경 경판이 전쟁 통에 불타고 만다. 무신정권 집정 최이와 불교계, 재상 이규보 등은 적이 물러가기를 바라며 대장경을 다시 새기기로 한다. 1248년 봄, 나(지밀)는 강화도 선원사 대장도감에서 팔만대장경 판각불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고려국 최고의 각수장이 승려 김승이 동방기독교 경교(景敎)의 ‘마리아와 예수 이야기’가 새겨진 엉뚱한 경판을 올려 보내온다. 대장도감 감찰이 된 나는 김승의 공방이 있는 변산으로 조사를 나선다. 남해 분사대장도감에서 여흥을 즐기던 그날 밤, 수백 장의 경판이 도난 당한다. 때마침 명필로 알려진 탁연이라는 필경사 감독 스님이 종적을 감춘다. 나는 최이 집정의 아들 만종이 주지로 있는 단속사를 거쳐 변산에 다다른다. 김승의 마을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서 무시무시한 돌개바람을 만난 나는 말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떨어지는 괴변을 당한다. 그 충격으로 말은 죽고 나는 눈이 멀어버린다. 데리고 갔던 종자 인보의 죽음, 경판을 훔친 탁연과의 조우, 경교도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기적처럼 눈을 뜬 나는 김승과 마주한다. 해인사 소속 승려였던 김승은 부인사에 파견돼 경판을 수리하던 각수장이였던 것. 나의 백부 유승단과 교류가 있었던 김승은 ‘고려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대장경 판각사업은 처음부터 날조된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편, 강화도에서는 김승의 수양딸 지양이 최이와 최항을 독살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무인정권에 반한 세력들은 최이를 비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신식 화약무기까지 동원해 급습한다. 태자는 몰래 바다를 건너 개경의 몽골 지방장관 다루가치를 만난다. 다루가치는 자신이 몽골군 별동대를 이끌었던 장수였다며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을 불사른 사실이 없다고 증언한다. 태자는 혼란에 빠진다.

[일러스트=이용규]

 “이건, 이건 말도 안 되오. 말도 안 돼. 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소.”

 정신을 수습한 태자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두런댔다.

 “지금 이 나라에 말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있다고 보오?”

 천막 안을 서성이던 토야 다루가치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통역하던 내시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승전국 지방장관이라지만 태자 앞이 아니던가.

 “그래요. 다 전쟁 때문이오. 전쟁은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거니까요.”

 주눅 든 태자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읊조리자 토야는 고함을 치고 나왔다.

 “모르는 소리 마오! 전쟁은 복잡한 세상을 간단히 정리하는 거요! 승자와 패자로 말이오! 승자는 얻고 패자는 복종하면 그뿐이오. 그런데 고려인들 참으로 징글징글하오. 앞에서는 항복하고 뒤에 가서는 저항하고. 처음 약속대로 우리 몽골 대제국에 조공 잘 바치고 세계가 하나 되는 데 힘을 보태야지. 왜 쥐새끼들처럼 섬에 숨어들어 가서 엉뚱한 대장경 경판을 새기며 버티는 거요! 당장 대군을 파병해 섬이고 뭐고 박살내버리면 고려인은 멸종이오, 멸종!”

 화가 치민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쥐새끼들이라는 표현에 태자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당신들과 우리는 멀리 보면 한 종족이나 다름없소. 옛 조선이나 고구려 때는 당신들 중심으로 하나의 제국을 이뤘듯 지금은 우리 몽골 중심으로 하나가 되려는 것뿐이오. 당신들이 하면 되고 우리가 하면 안 되는 거요?”

 토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개 숙인 태자는 이규보 재상이 남긴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속으로 되뇌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고구려인들의 말발굽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였다. 웅혼한 그 기상이 어디 고구려 때만의 일이던가. 고려 초에도 동아시아 최대의 강자였던 요나라와 단독으로 싸워 10만 거란군을 괴멸시킨 역사가 있었다. 강감찬 장군이 활약했던 귀주대첩이었다. 불과 200년 지난 오늘날, 고작 1만 몽골 기마군단에게 본토를 내주고 이런 능멸을 당하다니 가슴이 미어터졌다. 그것도 무인정권 천하에서.

 “…우리의 공격 목표는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인 고려가 아니라 중국과 서역, 그리고 대진국(로마)이오. 우리와 친연관계가 있는 문명국 고려가 이 위대한 정복전쟁을 돕는다면 대몽골제국 황제께서는 그에 합당한 지위를 줄 것이오.”

 토야는 아우 대하듯 태자를 어르기 시작했다.

 “그대가 알다시피 내겐 아무런 실권이 없습니다.”

 “돌아가서 부왕과 최이 집정을 설득하시오. 그리고 다시 와서 나와 뒷일을 상의하도록 하오. 필요하면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만들어보겠소.”

 그 말을 듣고 태자는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고려 왕실의 뜻이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만 확실하다면!”

 “알겠습니다.”

 태자의 낯빛이 밝아졌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부인사 대장경 경판은 누가 태웠다고 보십니까?”

 “낸들 알겠소? 왕자가 속 시원히 밝혀보시오”

 천막 밖으로 해가 이울어 어스레한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토야 다루가치는 연회를 준비시켰다. 천막 안팎으로 밝은 등불이 내걸렸다. 등불은 유리로 된 투명한 갓을 씌워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았다. 대식국(아랍) 장인들이 만든 등이라고 했다. 푸짐한 잔칫상이 차려지고 짙게 화장한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항라 차림의 무희들은 몽골군 위안부 노릇까지 겸하는 고려 여인들이었다. 악공들 몇이 조잡한 마두금(馬頭琴)과 뿔피리로 무당 푸닥거리할 때나 어울리는 악기 소리를 냈다. 소리가 뜨고 단조로워 귀에 거슬렸다.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다던가. 섬세함과 깊이가 없는 야만인 음악이 명백했다. 그런데도 다루가치와 몽골군 장교들은 흥에 겨운 나머지 몸을 흔들어가며 독한 아르히를 마셔댔다. 아르히는 그네들이 가져온 투명한 소주였다.

 무력과 문화는 별반 상관이 없구나.

 소주를 마시며 태자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톡 쏘는 소주의 깔끔한 맛만큼은 천하일품이었다.

 “어떻소? ‘양치기의 노래’와 ‘씨름 응원가’라오. 이번에는 고려의 거문고 연주를 들어봅시다. 이 나라 사대부라면 능히 거문고를 뜯을 줄 안다던데 왕자는 오죽하겠소?”

 거문고가 나왔다. 태자는 오른쪽 무릎에 거문고를 얹고서 눈을 감았다. 흥을 돋우는 속악(俗樂)은 많았다. ‘만전춘’이나 ‘쌍화점’ ‘동동’ 따위의 정분난 남녀 이야기 같은 건 할 자리가 아니었다. 고려인의 자부심과 기품이 넘치는 곡으로 골랐다.

 “민간에서 널리 불리는 ‘바람 타는 소나무’를 병창해보겠소.”

 술대로 줄을 튕기며 짚자, 깊은 우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일었다. 태자의 청아한 목청이 열렸다.

 해동 천자 우리 황제

 부처와 하늘이 도우시니 교화가 널리 퍼져

 세상 다스려지도다.

 …사해(四海)가 승평(昇平)하고 유덕하여…

 

 “고려는 참 묘한 나라요. 술 마시고 부르는 속악까지도 어찌 그리 품격이 높소.”

 노래가 끝나자, 토야는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 노랫말 중에 담긴 사해, 곧 온 세상의 화평을 바라는 고려인의 염원을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웃음은 거두었다. 곧 거나하게 취한 다루가치는 무희들을 끼고서 춤을 추었다.

 흥이 날 리 없는 태자는 억지로 버티다가 밤이 늦어서야 옆 천막을 숙소로 배정받았다. 내시와 한 천막을 쓸 수밖에 없었다. 침상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대장경 생각뿐이었다.

 부왕은 몽골군의 짓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안 태웠다면 도대체 누가 태웠다는 것인가. 그처럼 중대한 일을 부왕과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최이 집정이나 대장도감 수기 스님은 진상을 알고 있지 않을까. 무신 최고 권력자와 불교계 최고 실력자가 모를 리 없다. 둘 다 알고 있거나 어느 한쪽만은 알고 있을 게다.

 ‘지금 이 나라에서 말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있다고 보오?’

 토야의 비아냥거림이 맴돌았다.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하고 아침을 맞았다. 날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곧 다시 만납시다.”

 숙취로 얼굴이 퉁퉁 부은 토야가 배웅했다. 그는 선착장까지 호종할 기마병을 넷이나 붙여주었다.

 도성을 벗어나자 캄캄해진 하늘에서 천둥이 울었다.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후두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우박이었다. 지천으로 쏟아져 내리는 우박이었다. 모자를 썼는데도 머리가 아플 만큼 커다란 얼음 알갱이들이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퍼부었다. 우박은 길 위에서 어지럽게 튀며 쌓였다. 그 우박을 밟고 미끄러진 말이 울부짖었다. 말 한 필이 날뛰자 다른 말들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자욱한 들판 속으로 들입다 질주가 시작되었다.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치달리는 말 위에 엎드려 있자니 태자는 혼이 뜰 지경이었다. 거짓말처럼 우박이 멈추고 말들이 속력을 늦췄다.

 “윽!”

 앞에서 달리던 몽골군 하나가 갑자기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말은 주인을 내팽개쳐두고 멀리 사라져버렸다. 얼핏 보니 말에서 떨어진 몽골군의 등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태자 저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저를 따라오소서.”

 내시가 옆에 달라붙어서 외쳤다. 태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박 속에서 칼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초적들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만.”

 둘은 들판 한가운데 밤나무숲 쪽으로 황급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따라 잡히고 말았다.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그들은 여럿이었다. 무관 출신 내시가 칼을 뽑아 맞서 보았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 합 붙어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혔다.

 “웬 놈들이냐? 이분은 이 나라 태자시다.”

 무장해제당한 내시가 짐짓 위엄을 갖추고 외쳤다.

 “하하하, 이 땅에서 왕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 태자는 무슨! 이자는 몽골 다루가치 놈 앞에서 노래를 불러 바친 자가 아니더냐? 한 여름날에 우박 맞은 생쥐 꼴 하고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이쪽 사정을 죄다 꿰고 있는 고려인들이었다. 뒤이어 두 필의 말이 달려와 합류했다. 초적 무리의 향도로 보이는 자가 태자에게 칼을 빼들었다. 튀긴 피가 얼룩진 얼굴에는 살기가 넘쳤다.

 “그대가 태자가 아니라면 나는 그대를 돌려보낼 참이오. 하나, 그대가 정녕 태자라면 나는 오늘 그대 목을 벨 참이오. 왜냐? 우리 백성들을 버리고 강도에 숨어버린 죄, 황성을 되찾고자 갖은 고생하며 싸우는 우리를 위문하기는커녕 몽골 다루가치 놈을 만나 작당이나 한 죄를 물어서 말이오. 어서 그대 입으로 말해보시오!”

 향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시가 태자의 옆구리를 표 안 나게 찔렀다. 부인하라는 주문이었다. 태자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그만 무너져 내렸다.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태자 맞소. 나를 죽여주시오.”

 태자는 눈을 감았다.

 “태자 저하!”

 내시 역시 바로 옆에서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었다.

 “나는 늘 버려두고 온 본토가 그리웠소. 고난의 짐을 진 백성들이 가여웠소. 그래서 몰래 강도를 빠져나왔소. 다루가치를 만나 부왕과 내가 출륙하여 백성들을 돌볼 방도를 물었던 것이오.”

 “으하하하-. 싸워 물리쳐야 할 적에게 방도를 물었다?”

 “협상은 적이 아니라 귀신과도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럼 죽어서 귀신과 협상하시오.”

 칼날이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다. 눈을 뜬 내시의 무릎 앞에 태자의 상투머리가 떨어져 굴렀다.

 “잊지 마시오. 조상이 물려준 강토를 어찌 그토록 쉽사리 오랑캐들에게 넘겨줬더란 말이오. 비굴한 무신들과 왕실이 버린 우리들이지만 몽골 놈들과 끝까지 싸울 거요. 최후의 일인이 남을지라도 끝까지 싸워 마침내 물리칠 거요.”

 초적이 아니라 의병들이었다. 그들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들녘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우박 맞은 농작물들은 쓰러 넘어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전쟁 통에 한여름 우박까지 쏟아져 생민들의 먹을거리가 작살나버린 것이다. 태자는 해사한 두 손으로 땅을 후벼 파다가 하늘을 원망하며 통곡했다.

 내가 김승의 마을로 감찰 내려와 있는 동안, 강도와 옛 황도 개경에서 벌어진 그 이야기들은 훗날 들은 것들이었다. 나와 막역한 태자저하가 그처럼 험악한 꼴을 당한 건 까마득히 모른 채, 나는 고려 제일의 각수장이 김승에게 홀려 있었다. 눈멀었던 사흘간의 지옥 체험 직후라서 더 그랬을 게다. 그가 믿는 경교는 매우 참신해서 나, 지밀이 이제껏 독실하게 믿어온 불교를 송두리째 부인하고픈 충동에 빠졌고, 차마 믿기지 않는 폭로 앞에서 분개했다. 몽골군으로 가장한 최이의 사병과 승병 정예군들이 대장경 경판을 불사르는 현장에 그가 있었다니 왜 안 그랬겠는가.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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