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이승엽 과연 국민타자?

중앙일보

입력

언제부터인가 이승엽에게는 '국민타자'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한국타자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 호칭의 기원은 99년에서 유래됐다.

시즌 54개의 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홈런을 훌쩍 넘어 일본의 왕정치가 가지고 있던 아시아 신기록까지 위협했었던 이승엽에게 이후 '국민타자'라는 명함이 줄곧 따라다녔다. 모든 언론사와 수많은 야구팬들이 이승엽의 지칠 줄 모르는 홈런포에 열광했고 많은 관중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인 그는 침체된 한국야구를 부흥시킨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승엽을 국민타자로 부르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많다.

국가대항전 형식의 중요한 경기에서 너무나 맥없는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을 실망시키는데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지난 해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에서 그는 17타수 3안타로 0.176의 부진을 보였다. 시즌 내내 뿜어대던 홈런포도 이 대회에서는 고작 한 개에 불과했다.

고교졸업 후 프로에 직행하며 청소년대표 외에 별다른 국가대표 경험이 적어서 그랬던 것이라 치며 지난 해 말 한일수퍼게임으로 '국민타자'에 대한 기대를 이어갔다.

왕정치와 연일 비교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승엽의 방망이는 이 대회에서도 힘없이 돌아갔다. 한국의 최고타자가 이 정도뿐이 안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일본을 대표하는 타자 마쓰이와 보기 좋게 비교돼 다시 한번 최고스타의 그늘진 모습에 야구팬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국제경기에서의 이승엽의 부진은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타석에 6번 들어서 안타가 하나도 없고 희생플라이로만 1타점을 올렸을 뿐 헛방망이질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호주와의 경기에서 5-3으로 뒤진 9회 무사 1루에서 삼진아웃 당하고 쿠바와의 경기에서도 4타수 무안타에 2개의 삼진을 당하는 등 이승엽은 중요한 고비마다 공격의 맥을 끊어버렸다.

물론 이번 대회 전에 입은 무릎부상으로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정도로 국제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타자에게 '국민타자'라는 수식어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플레이는 평범하다 못해 저조하기까지 하다.

진정 국민을 대표하는 타자라면 국민들이 하나같이 응원하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진가를 발휘해야 함에도 이승엽은 오히려 그에 역행하는 '국내용'으로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18일 호주에게 분패를 당하고 박경완도 부상을 입어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 숙소를 이탈해서 동료들과 같이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긴 그의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국민타자'의 칭호를 쓰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타자를 대표하는 '훌륭한 타자'라는 범주 내에서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오히려 이승엽에게 '국민타자'라는 타이틀을 부여시키면서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과대포장하기 좋아하고 타이틀 붙이기 좋아하는 우리 언론에 어쩌면 이승엽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국민타자'라는 훈장을 떼어버리고, 이승엽이 남은 경기에서 그 동안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을지 지켜보자.

한 선수에 대해 맹목적이다시피 형성된 시각을 이제는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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