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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진실은 항상 뒤쪽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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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지난해를 뜨겁게 달군 희망버스. 크레인에서 농성한 김진숙씨는 ‘소금꽃’ 영웅이 됐다. 그 후 한진중공업과 노조원들은 어떨까. 한마디로 만신창이다. 노조는 설날 전 두 동강 났다. 민주노총 계열의 기존 노조에 맞서 유연한 복수 노조가 생겼다. 순식간에 조합원 703명 중 압도적인 510여 명이 새 노조로 옮겼다. 강성노조가 박살 난 것이다. 민주노총은 “회사의 음모”라 우기지만, 노동자의 선택권에 대한 모독이다. 오히려 잦은 정치적 파업으로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묻어난다.

 희망버스 이후 한진중의 수주실적은 ‘0’이다. 간신히 작은 군함 3척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일감이 없으니 생산직 절반인 350명이 휴직 중이다. 회사도 이미 골병이 들었다. 건조하던 선박 7척의 납품 기일을 어겨 수백억원의 벌금을 물었다. 희망버스 측이 “미리 수주해 놓고, 회사가 사기 쳤다”던 4척의 건조 의향서(LOI)도 물거품이 됐다. 지금 영도조선소엔 희망(希望) 대신 절망(絶望)이 지배한다.

 조합원들은 내일의 불안에 떤다. 영도의 도크는 길이 300m에 폭 50m다. 컨테이너선은 6000TEU가 한계다. 그 이상은 길이가 300m를 넘는다. 요즘 효율성을 따지면서 1만TEU 이상의 컨테이너선이 대세다. 현대·대우·삼성중공업의 대형 도크는 1만8000TEU급까지 척척 만들어 낸다. 영도조선소의 폭 50m도 너무 좁다. 초대형 유조선은 너비가 60~80m여서 아예 지을 수 없다. 중형 컨테이너선과 벌크선이 유일한 희망이지만, 이쪽은 범용기술로 추격한 중국 조선업체들의 독무대가 된 지 오래다. 한진중의 평균연봉 6000만원으론 연봉 500만원대의 중국과 가격경쟁이 안 된다.

 현대중은 얼마 전 조선 근로자 수천 명을 해양플랜트로 전환배치했다. 국제 선박가격이 반의 반 토막 난 반면 해양유전 붐으로 해양플랜트 시장이 뜨거워지자 단행한 조치다. 한진중엔 이런 전환 배치는 그림의 떡이다. 나머지 절반이 건설인데, 이쪽도 찬바람이 쌩쌩 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해고 노동자들이 복귀해도 일감이 없다. 조선시장의 대폭등이란 기적을 바라는 신세다. 자칫하면 한진중도 법정관리에 들어간 중형 조선업체들의 운명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난해 희망버스의 승자는 김진숙씨와 야당이다. 정치적 목적을 120% 달성했다.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다. 만의 하나 한진중이 비극을 맞는다면 온 국민이 뒷감당해야 한다. 구제금융을 투입하면 혈세만 축나게 된다. 민주노총도 주력부대를 잃었다. 승리에 도취한 강성노조가 제주 강정기지 등 전국 연대투쟁에 골몰하는 사이 발밑이 무너진 것이다. 한진중은 지난해 천금 같은 구조조정 기회를 날렸다. 냉정하게 복기(復棋)해 보면 해고 노동자보다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해고 노동자를 살려내라”던 외침이 언제 “한진중을 살려달라”는 아우성으로 바뀔지 모른다.

 가끔씩 우리 사회가 집단적 사치(奢侈)에 빠지는 느낌이다. 천성산은 지율의 주장과 달리 여전히 도롱뇽 천지다. 최종 피해자는 도롱뇽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가정보원이 전국의 도롱뇽을 잡아 천성산에 풀었다”는 웃기는 괴담은 납세자의 분노에 물타기하려는 수작은 아닐까. 제주 해군기지도 마찬가지다. 낯익은 골수 반대파들이 상주하며 공사를 방해하고 있다. 공사가 한 달 지연되면 자동으로 세금 30억원이 낭비된다. 이렇게 우리 주머니를 터는 자해(自害)행위에 우리 사회는 너무 관대하다.

 앞 얼굴이야 화려한 화장으로 감출 수 있다. ‘희망’ ‘환경’ 같은 추상적 구호는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뒷모습이야말로 거짓말을 못한다. 사진계의 거장인 프랑스의 에두아르 부바는 평생 피사체의 뒷모습만 찍은 작가다. 그 사진집에 미셸 투르니에는 이렇게 썼다. “…진실은 항상 뒤쪽에 있다.” 이제 우리도 희망버스가 남긴 손익계산서를 따져봐야 한다. 천성산, 영도조선소, 강정기지의 뒷모습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으면 한다. 한 번의 실수는 몰라도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실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