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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다시 묻는다] 1. 위기는 극복됐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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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많은 의문부호가 따라붙고 있다. 주식.금융시장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자 경제가 과연 옳은 궤도를 따라가고 있느냐는 회의가 깊어지고 있다.

현 정권의 집권 후반기와 맞물려 남북문제라는 새로운 변수에다 예정된 정치일정에 따른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고유가라는 외생(外生)요인도 현실로 닥쳤고 가장 큰 부실인 대우 처리는 다시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들이라 진단과 처방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우리 경제를 재고(再考)해보고 대안을 찾는 기획을 다섯번에 나누어 싣는다.

다들 긴장이 너무 풀렸다.정부·기업·가계 할 것 없이,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 나와 외채를 갚자며 줄 서던 2년 반 전 시절을 잊었다.서로 네 탓이요,제 몫 챙기기에 바쁘다.모여 앉으면 경제와 민생 걱정을 하면서도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들이다.

나흘간의 추석 연휴를 푹 쉬고 나온 지 하루만인 15일,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라왔다.두달여 전 만해도 대우자동차를 7조7천억원에 사겠다던 미국 포드자동차가 최종 가격도 내지 않고 아예 인수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정부는 ‘타이어 리콜 같은 포드의 내부 사정’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외신들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대우차가 회계장부마저 조작한 사실이 결정적’‘대우차는 돈 먹는 블랙홀이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공교롭게 같은 날 금융감독위원회는 김우중(金宇中)전 대우 회장을 비롯한 대우 임직원 41명을 회계장부 조작과 부실 은폐 혐의로 검찰에 고발 또는 수사통보했다고 발표했다.무려 41명의 임원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면서 금감위는 범죄행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법원에서 판단할 문제라며 전·현직 사장 등 9명의 이름만 공개하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금감위가 적발해 낸 대우 계열사 회계장부 조작금액은 22조9천억원,이 가운데 대우차 분식회계가 3조2천억원이다.

정부는 지난해 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선언했다.해외 경제전문기관이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한 모범사례’라고 추켜세울 때마다 자기 자랑에 바빴다.그러나 제2의 경제위기설이 불거질 정도로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마틴 알렌 주한영국상공회의소(BCCK)회장은 “한국이 외환위기의 급한 불은 껐지만 기업·금융 구조조정 같은 경제개혁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0여년 전 비슷한 일을 당한 ‘환란(換亂)선배’영국은 아직도 외국자본 유치·공기업 민영화 등 구조개혁을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부실 금융을 치유하는데 이미 1백1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지만 금융산업은 여전히 실물경기의 발목을 잡고 있다.앞으로도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은행 통폐합 등에 20조∼40조원이 더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그럼에도 정부는 공적자금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강변하다가 최근 경제팀이 바뀌고서야 그 필요성을 자인했다.

민생은 택시 안에서 생생하게 들린다.한 택시기사는 “의료파업으로 몇달째 병원가기가 겁나고 아내는 장바구니 물가가 다락같이 올랐다고 야단인데,머리를 맞대고 난국을 풀어야 할 국회는 정쟁으로 날샌다”고 말했다.추경예산과 구조조정 관련 입법,정부조직 개편 등 현안이 여의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사회 분위기도 느슨해졌다.다시 분 해외여행 바람으로 김포공항 청사가 붐빈다.지난 7월 여행수지가 33개월만에 적자로 돌아섰고,휴가철인 지난달엔 월별 사상 최대인 56만명이 해외로 빠져나갔다.지난 추석 때 백화점에선 중저가보다 고가 상품 매출 증가율이 더 높았다.유가 오름세와 관계없이 경차 판매는 줄고(1∼8월중 마이너스 30.5%)중·대형차 판매가 급증(배기량 2천㏄ 이상 대형차 증가율 42.6%)하고 있다.통계상(지니계수)으로도 빈부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기업은 어떤가. 외환위기 상황에서 인력과 조직을 감축하고 사업을 정리한 덕분에 형편이 나아진 기업들 가운데는 언제 어려웠냐는 듯 사업을 확장하는 곳도 있다.인터넷이다,바이오다 하면서 계열사가 경쟁적으로 채용하자 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제동을 걸기도 했다.여윳돈을 본업과 무관한 벤처투자에 굴려 ‘돈놀이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개혁이 가장 더디다는 공기업은 최근 정부의 ‘단전·단수 조치’까지 받았다.기획예산처가 1백10개 공기업의 인건비를 7백18억원 깎으면서까지 인력 감축을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근로자의 목청도 커지고 있다.주당 근로시간 단축·토요근무제 실시 등을 들고 나왔다.어떤 중소기업은 노조원 2백여명에 노조 전임자를 6명에서 9명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주변 환경은 숨가쁘게 변하고 있다.국제 원유가격은 산유국의 증산 합의에도 불구하고 지난 15일 배럴당 36달러까지 치솟았다.원유가격이 1달러 오르면 1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날리는 게 우리나라다.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하는데 정부 대책은 20년전이나 10년전이나 같은 메뉴다.미국은 정보통신,일본은 부품소재 산업에서 에너지를 적게 쓰는 대안을 찾았지만 우리는 그런 단계에 오르지 못했다는 지적(산업자원부 홍기두 자본재산업과장)이다.

수출을 이끌어 온 반도체값 하락이 유가 급등과 함께 무역수지를 위협하고 있다.18일 경의선 복원 사업을 착공하는데 남북경협을 활성화하는데도 상당한 국가재정이 들어가야 한다.경원선 등 남북한간 4개 철도를 잇는 데 4조원이 넘게 든다.

익명을 원한 민간경제연구소장은 “최근 내년 경영전략을 수립하다가 이 상태로 가면 제2 경제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쉬쉬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2백개 기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88%가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응답했다.대한상의 김효성 부회장은 “정부·민간 가릴 것 없이 자만심에 빠져 긴장이 풀린 감이 있다”고 말했다.

향영21세기리스크컨설팅 이정조 대표는 “지금은 정부가 앞장서 풀어야 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더 늦기 전에 처음 하는 마음(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경제 주체가 모두 자기 기본을 찾아야 현재의 위기 상황을 풀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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