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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재판 납득 못해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 나온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이번엔 재임 시절 이야기 좀 해 달라. 재임 중 가장 큰 이슈가 됐던 것이 신영철 대법관의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사건 재판 개입 논란이다. 이로 인해 신 대법관은 진보진영으로부터 거세게 사퇴 압력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이들 주장처럼 법원장의 재판 개입인가, 단순히 사법행정에 대한 독려인가.
“재판을 서두르라고 신 법원장이 지시한 것을 두고 일선 판사들이 압력으로 느꼈다면 그건 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판사마다 양심에 따라 재판하면 될 일이다. 일부 판사는 압력으로 느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사법행정 차원에서 법원장이 재판을 독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런 것 아닌가.”

-당시 신 대법관이 사퇴 압력을 받았을 때 원장께서 침묵으로 진보진영 요구에 동조했다고 우파에서는 비난했는데.
“신 대법관 사퇴 압력에 대해서는 대법원장이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었다고 본다.”

-재임 중 진보적 시각을 가진 판사들을 중용하는 등 코드인사를 했고, 사법부를 좌편향으로 이끌었다는 비판도 많다.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덜 가진 자, 사회적 약자, 서민, 소수파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원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사회이지만 이들 약자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걸 막는 장치가 바로 법이고 법원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법원장 직을 수행한 것을 두고 좌편향이라고 말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사는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적합하게 했다고 본다.”

-재임 중 제청했던 대법관 다섯 명(김영란·이홍훈·박시환·김지형·전수안)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소위 진보적 시각을 가진 분들이다. 이들 중 네 분이 퇴임하고 전수안 대법관(올 7월 퇴임 예정)만 남았는데.
“이들 다섯 분이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에서 소수나 약자 편에서 같은 성향의 판결을 내려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다. 나는 대법원이야말로 다양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들어와 서로 토론하고, 현대사회에 맞는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생각만 갖고 있는 사람들로 대법원이 구성된다면 반대편에서 어떻게 결과에 수긍하겠나. 어느 시점에선 이것이 다수의 의견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될 수도 있다. 우리도 소수의 목소리, 약자의 목소리가 최고법원을 통해 반영되고 ‘저런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알려져야 한다. 대법관으로 지내면서 소수의견을 많이 썼는데 대법원장이 되고 나니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소수와 약자 편에서 귀 기울일 수 있는 통로가 최고법원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법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던 미국이 1861년 남북전쟁이 난 뒤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도 1920년대였다. 그전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했다면 세칭 ‘또라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법원장에 임명됐는데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공식석상 외에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재임 중 만난 인상에 의하면 사심 없고 소탈한 분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나 중화학공업 육성, YS(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DJ(김대중)의 정보기술(IT)산업 육성처럼 국민에게 미래에 대한 큰 비전을 심어 주고 끌고 간 스타일은 아니고 항상 소수, 약자, 그런 편에서 사람답게 사는 열린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통치했던 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공판중심주의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나.
“요즘은 열심히 잘하고 있지 않겠나. 그런데 차 한잔하자고 해 놓고 어려운 질문이 너무 많다(웃음).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 유무죄 판단을 법정에서 가리는 게 공판중심주의다. 법정에서 죄를 가려야 제대로 된 재판이지 검찰 수사기록만 보고 유죄를 인정한다면 그런 재판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그런 재판은 국민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는 우리 법원이 가야 할 방향이고, 또 정착돼야 한다고 본다. 근래 법원의 영장발부율이 많이 낮아졌는데 영장은 원래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 경우에 발부하는 거다. 유죄 확정 때까진 무죄로 추정하라는 게 헌법에 명시돼 있다. 기결수가 아닌 한 범죄 혐의자에 불과한 것이다. 죄가 가려지지 않았는데 구속재판을 주장하는 것은 수사편의주의일 뿐이다. 이는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강력범 등 사회질서를 파괴할 우려가 있는 경우는 당연히 격리를 해야겠지만.”

-공판중심주의로 인해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거나 기업인이어서 화려한 변호인단을 꾸릴 힘이 있는 경우 무죄나 집행유예, 벌금형 등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전무죄 시비를 일으킬 소지가 있지 않나.
“유죄 입증은 검찰이 할 일이다. 검찰이 유능한 변호사를 탓해서야 되겠나. 미국 드라마에서도 보면 검사가 이 사람은 유죄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배심원들에게 심어 주도록 증거를 대고 또 설득도 한다. 어느 나라든 검사는 피고인이 유죄라고 판사를 설득하도록 돼 있다. 만일 판사가 변호사나 피고인에게 설득당했다면 검사가 무능한 거다. 판사가 검사 편을 일방적으로 든다면 피고인이 동의하겠나. 피고인도 국민의 한 사람인데.”

-취임 1주년 때 ‘검사가 낸 수사기록을 던져 버리라’고까지 해 검찰의 반발이 심했는데.
“검찰의 수사기록에만 의존한 채 판사가 법정에서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고 재판하면 법을 지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법원은 그동안 재판을 제대로 안 했다. 그러다 보니 ‘도가니’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가 나오는 거다. 지금까지 재판을 효율로만 생각해 국민의 불만이 많은 거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등은 국민이 법정에서 재판 과정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만이 나온 것이다.”

-평소 유능한 법관은 재판 잘하는 법관이라고 했는데 재판 잘하려면 어떻게 재판을 해야하나.
“판사는 법정에서 말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무조건 들어준다고 재판을 잘하는 게 아니다. 당사자들은 하소연도 하고 호소도 하고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유능한 판사라면 이들이 조리 있게, 사건 구성에 필요한 진술, 즉 ‘요건사실’을 정리해 얘기하도록 유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판사를 잘 뽑아야 한다. 그간 우리 법원은 판결문 잘 쓰는 사람이 판사가 됐다. 실은 법정에서 말도 잘하고, 심리도 잘하고, 재판 진행도 잘하는 사람이 판사가 돼야 한다.”

-재임 중 재벌의 횡령 재판에서 솜방망이 판결이 내려진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회사 돈 300억원을 횡령한 오리온 담철곤 회장도 얼마 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 재벌 봐주기란 논란이 일었다.
“특정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같으면 소위 전문경영인이 분식회계를 하거나 횡령을 했다면 우리같이 (집행유예로) 처벌되는 일은 없다. 그런 양형 때문에 법원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서민을 생각해 봐라. 1억원을 훔쳤다고 하면 실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300억원 횡령한 것을 서민이 1억원 훔친 것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300배가 되니까. 그런데 돈 많은 사람들이 법원에서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국민의 일반적 인식이다. 이게 사법 불신의 큰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과 우리가 양형이 달라지는 이유가 있다. 미국은 회사 경영자가 거의 전문경영인이고, 우리는 대주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은 물어야 하는 게 맞다. 51% 주주라 해도 49%에 해당하는 나머지 주주에 대해서는 남의 재산을 관리하는 게 아닌가. 판사들이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다.”

-4월이면 1500여 명의 로스쿨 출신 법조인이 쏟아진다. 얼마 전에는 1000여 명이 사법연수원을 졸업했다. 새내기 법조인들의 취업난이 극심한데.
“기존 사법시험제도로 변호사를 양성하는 것은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로스쿨이 생겼다. 법학 외에 공학·금융·의학·식품 등 다른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 변호사가 되면 그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효율적으로 법률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모두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개업할 생각을 하면 직장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각자 자기 전공 분야로 돌아가면 일자리는 많다고 본다. 예컨대 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공학 쪽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 한다. 국회에서 식품안전법에 관한 법률을 만들 경우엔 식품과 법에 모두 식견을 갖춘 해당 분야 법률가가 필요할 것이다. 모두가 로펌에 가고, 판검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면 일자리는 없다. 이제 종래처럼 떵떵거리는 변호사들의 시대가 아니란 뜻이다. 이제 변호사는 은행원·기술자와 똑같지만 법을 조금 더 안다는 자격자 그 이상이 아니다. 벼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배 법관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내 생각은 지난 6년과 똑같다. 재판을 잘해야 신뢰가 생긴다는 거다. 재판을 잘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다.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전국에 2600명이 넘는 판사가 있는데 그중 2599명이 잘해도 한 명이 잘못하면 전국 법관이 잘못한 것으로 투영 된다. 만약 2500여 명의 판사가 전관예우, 막말 재판을 하면 법원이 문을 닫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렇지 않기 때문에 법원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지난 6년간 오히려 법원에 대한 신뢰가 저하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금이 변화의 시작이어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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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1942년 전남 보성 태생. 광주일고-서울대 법대 졸업. 1962년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대전지방법원-대법원 재판연구관-사법연수원 교수-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서부지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대법관(2000년 퇴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변호인.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04년)을 거쳐 2005년 대법원장으로 제청됨. 2011년 9월 퇴임 후 11월 고려대 석좌교수로 부임. 서울 서초동 은혜교회 장로. 가끔 즐기는 골프는 90타 정도. 부인 고은숙씨와 2남1녀.

정리=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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