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좋을 때 허리띠 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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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쾌속 질주해 온 삼성이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삼성은 올들어 비대 조짐을 보이는 인력.조직의 군살빼기에 나서는 한편 현금 확보에 주력하면서 부채비율을 지속적으로 낮추고 있다.

경기순환에 예민한 반도체의 비중을 낮추기 위해 이른바 '월드 베스트' 상품을 다양화하려는 전략도 속도를 더하고 있다.

삼성 40여개 계열사 전체의 올해 예상 매출액은 1백10조원에 세후 순익이 9조원. 특히 삼성전자는 창사 이후 번 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5조여원의 순익을 올 한해 거둘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외 경영환경이 불투명해지자 1990년대 중반 반도체 호황에 안주했다가 준비없이 외환위기를 맞은 아픈 경험을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위기의식 아래 내실 다지기 경영에 들어갔다.

◇ 위기 관리와 내실경영〓현재 11만7천명 수준의 그룹 인력을 가급적 늘리지 않기로 했다.

삼성 관계자는 "올들어 전자.물산.SDS 등 관계사별로 인터넷 등 신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공격적으로 뽑았지만, 이제 꼭 필요한 핵심 전문 기술인력과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정도를 제외하곤 가급적 신규 채용을 보류할 방침" 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수익이 적은 사업은 과감히 포기하는 한편 신규 차입을 자제해 부채비율을 더욱 낮추면서 비상시에 대비한 현금 확보에 주력하기로 했다.

삼성의 올해 예상이익 8조원에 감가상각을 위한 충당금 5조원을 합친 13조원의 여유자금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 이 중 9조원을 투자하고 남은 돈 4조여원을 연내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 빚.회사채의 상환에 돌려 부채비율을 지난해 말 1백66%에서 올 연말 1백30%대까지 낮출 계획이다.

더욱이 삼성은 최근 올해 투자계획을 하향 조정할 움직임을 보여 차입금 상환 규모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삼성은 금융시장의 신용경색과 증시 침체가 장기화하고 국제 원유가격의 고공행진 등으로 인한 물가 오름세 심리가 퍼져 경제가 위기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보고 계열사별로 구조조정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뼈가 시리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게 경영진의 분위기" 라고 전했다.

다른 그룹도 이같은 삼성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데다 현대그룹의 분할로 재계 1위 자리를 되찾은 삼성이 어떤 방법으로 경영을 혁신할지 관심거리" 라고 말했다.

◇ 선택과 집중 전략〓삼성은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긴축.감량 경영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써야 할 데는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삼성의 월드 베스트 제품을 현재 12개에서 2005년 30개로 늘리기 위해 관련 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반도체.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를 비롯, 브라운관의 성공을 바탕으로 현재 시장 점유율 5위권인 전자레인지.비디오카세트레코더(VCR).휴대폰 등을 세계 정상 제품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산업연구원 주대영 연구위원은 "삼성은 반도체와 TFT-LCD 분야의 확고한 위상에 안주하지 말고 2차 전지 및 첨단 센서.광통신 등 차세대 전자산업에 투자를 늘려 기선을 잡아야 한다" 고 말했다.

삼성은 전자.인터넷에 이어 생명공학을 제3의 미래 주력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연내 별도 법인을 만들 계획이다.

인력관리 측면에선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성은 올들어 '공채 순종주의' 대신 퇴직자.외국인은 물론 현대.LG 등 경쟁사의 기술인력을 과감히 수혈하고 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인사팀 관계자는 "대규모 공채 같은 투망식 채용을 지양하는 대신 적재적소 인력을 개별적으로 스카우트하는 낚시형 채용 위주로 가겠다" 고 말했다.

삼성에서 일하는 박사급 인력은 올 상반기 2천명을 넘어섰으며, 연말에는 2천5백여명에 이를 전망이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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