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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명품’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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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논설위원

샤넬 2.55백 값이 또 오를 모양이다. 가장 비싼 게 600만원대이더니 다음 달엔 700만원대로 뛴단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백을 사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부 매장에선 백이 품절되기도 했다. 이 백은 지난해 봄에도 가격인상을 앞두고 사재기 열풍을 불러일으켰었다. 백을 사려고 파리에 가는 사람도 있다. 현지에선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200만~300만원 싸기 때문에 비행기표값이 빠진다고 해서 일명 ‘샤테크’여행이라고도 한다.

 마름모꼴 누비가방에 쇠사슬 줄이 달린 이 백은 누가 봐도 실용적이진 않다. 콤팩트와 립스틱·지갑 정도 가지고 다니는 ‘귀부인’들한테나 맞지, 스마트폰이다 태블릿이다 이것저것 구겨 넣고 다닐 게 많은 요즘 사람들한테는 불편하다. 그럼에도 소위 시집 잘 갔다는 여자들을 통칭하는 ‘청담동 며느리’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뜬 이후 이 백을 향한 열정과 극성은 나날이 도를 더해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좀 있는 집’ 혼수품으로 꼽히던 것이 요즘은 웬만하면 하는 혼수품목으로 떠오르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업체가 매년 가격을 올려도, 현지보다 몇백만원 비싸도 불티나게 팔린다.

 명품업계 입장에서 한국은 참 쉽고도 좋은 시장이다. 팔리는 양도 세계 2~3위권으로 많고, 비쌀수록 잘 팔리니 맘껏 고가정책을 펼 수도 있다. 이렇게 한국인이 봉노릇을 해주는 시장은 명품 말고도 몇 개 더 있다. 골프와 와인시장도 그렇다. 최근 미국 ‘USA투데이’는 미국의 골프산업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골프장 회원권과 주택은 폭탄세일을 해도 임자가 안 나서고, 파산하는 골프장도 늘었단다. 경기침체보다도 근본적으론 취미생활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골프장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라고 했다. 이 동네 골프장 주인들은 “한국인이 없으면 골프장 운영이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실제로 6년 전쯤 뉴욕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한 친구에게서 “요즘 골프 치는 사람은 푸줏간 주인과 한국인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뉴욕의 소위 오피니언 리더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주말 취미는 골프에서 요팅과 크루즈로 옮겨가고 있었다. 한데 한 번 꽂히면 죽자 하고 하는 기질 때문인지 한국인들은 사양화되는 미국 골프 산업까지 받쳐줄 정도로 여전히 골프에 시간과 돈을 바친다.

 와인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과 헌신은 우리 입맛과 문화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1990년대 말 한 친구가 “와인 공부를 하라”며 와인책 한 권을 준 일이 있다. 친구 말인 즉, 이미 일본에서 와인이 대중화 단계까지 쓸고 내려왔고 우리나라 트렌드 세터 사이에 와인 매니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 곧 한국도 와인이 휩쓸 것이니 조만간 대화에 끼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귓등으로 들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와인이라고 하면 “과실주는 머리가 아파서…”라며 기피했었다. 와인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독주를 즐기는 민족이 무슨 과실주냐는 생각도 했었다. 한데 몇 년 안 돼 ‘머리 아프다’던 그 사람들이 비싼 와인병을 따며 품평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일약 세계 와인업계의 큰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도 최근 본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계 평균소매가격보다 2.3배 정도 비싼 값에도 척척 사먹을 정도로 인기 주종이다.

 혹자는 말한다. 명품·골프·와인에 대한 집착과 헌신은 국민소득 2만 달러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일본도 똑같았다고. 잘살게 된 걸 자랑하고 싶어서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허위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2만 달러 시대는 너무 길다. 요즘 추세론 벗어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명품·골프·와인의 시대에 머물러야 하나. ‘1955년에 만들어진 2.55백이 정말 그리 예쁜가?’ ‘골프에 바치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나?’ ‘와인이 정말 입에 맞나?’ 이젠 이런 실속 있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