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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해체는 음모라고? … DJ도 힘쓸 상황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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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그룹이 해체된 지 10여 년,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 경영 공과(功過)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대우 해체 과정을 둘러싼 음모론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 기사에 달린 네티즌 댓글만 봐도 그렇다.

“DJ 정권이 의도적으로 대우를 해체시켰다” “자랑스러운 기업인 김 회장을 정치적 목적으로 희생시켰다”는 등의 의혹이 난무한다. 특히 한때 대우 임원이었던 이헌재 전 부총리에 대해선 “김 회장 뒤통수를 쳤다”는 원색적 비난도 나온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이런 음모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정면 반박했다.

 -가장 흔한 음모론이 ‘김우중 회장이 DJ 정권의 경제 관료들에게 찍혀 정부의 외면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정부 정책에 불만이었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할 게 아니라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정부의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대놓고 반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김 회장의 그런 얘기에 걱정이 많이 됐다. ‘구조조정 외엔 살 방법이 없다’고 시장이 인식하던 때다. 그런데 앞장서서 ‘반대한다’를 외치니 시장은 ‘대우가 구조조정을 안 하려고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대우는 자산 매각이나 외자 유치 같은 자구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당시 관료들 사이에 “대우를 손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건 아니란 얘긴가.

 “거시경제 정책에 대해 전문가나 학자가 아닌 기업인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대우를 손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한 건 정부도 금리는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조금씩 금리가 안정되고 있었다. 문제는 김 회장이 나서서 ‘금리 낮춰라’ 하니까 시장에서 ‘대우가 정말 다급한가 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거다.”

 -DJ 정권 초기엔 DJ를 후원해 온 김 회장이 가장 수혜를 볼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DJ가 청와대 비서실에 ‘대우 (금융 지원) 건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 ‘도저히 안 된다’는 보고를 여러 번 올렸다. 시장 상황이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무슨 뜻인가.

 “은행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다. 정부도 국제통화기금(IMF) 과의 협약 때문에 은행들에 ‘대기업 대출을 더 이상 늘리지 말라’고 압박하던 때다. 그런데 어느 은행이 대우에 돈을 빌려주겠나.”

 -그래서 DJ가 물러섰나.

 “DJ도 힘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입으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라’고 주문하면서, 한쪽으로는 ‘대우는 예외니까 무조건 살려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안타까우니까 계속 ‘검토하라’ 하는데, ‘그래도 어렵습니다’ 하고 공무원들이 난감해했다. 강봉균 경제수석이 1998년 11월 ‘대우 부채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DJ에게 올렸다. 그 이유가 뭐겠나. 대우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실상이 이렇습니다. 대통령께서 아셔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올린 보고서다. 사실 정부는 어떻게든 대우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으려고 애를 썼다.”

 -대우 임원을 지낸 것 때문에 인간적 고뇌도 있었을 텐데.

 “내가 대우를 너무 잘 알아서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금감위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 은행더러 ‘돈을 더 빌려주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부가 구조조정하라고 몰아세우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겠나. 나로선 롤오버(Roll Over·대출 만기 연장)가 최선이었다. 그것만큼은 그나마 명분이 있었다. ‘비 오는데 우산 뺏지 마라. 돈 빌려줬으면 책임을 져라. 시장을 파국으로 몰고 가지 마라’ 이렇게 요구한 거다.”

 -그런데도 음모론 끊이지 않는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우선 당시 일반 국민들은 대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반면에 김우중 회장에 대한 신뢰는 너무 컸다. 세계 경영을 주창하던 김 회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대우 주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주장을 퍼뜨린 면도 없지 않다.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은 외환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것 같다. 그때 시장 그림을 그려봐라. 금감위나 정부가 금융회사에 지원하라고 강압할 수 있는 분위기였는지. 삼성생명이 왜 대우를 위해 유동성 위기를 감수하면서 자금 지원을 하겠는가. 살벌한 판이었다. 재벌 기업들도 서로 살아남으려고 루머가 난무할 때다.”

  -김우중 회장과 한때 1년 반이나 함께 해외를 누볐다.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많이 안타까웠다. 알면서 외면하는 건지, 돌아가는 상황을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답답했다. 시장에 노력하는 흔적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런 건 없이 ‘시간을 달라, 돈을 달라’ 이러는 상황이었다. 내가 김 회장에게 ‘세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말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말은 한 적 없다.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겁니다’ 하고 거듭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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