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종혁의 세상탐사] 나꼼수와 개콘에 기대하는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4호 02면

젊은 운전자가 횡단보도 앞 신호등에 걸려 있다. 그 앞길을 노인 하나가 건너고 있다. 젊은이는 아마도 ‘바빠 죽겠는데 보행 신호는 왜 이리 긴 거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정반대다. “이 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왜 벌써 깜빡이가 시작돼 나를 불안하게 만드나”라면서 투덜거린다.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누구나 처한 입장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신호등은 모두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흔들리면 사회는 무너진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는 차안에 있는 젊은이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노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 때문에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함께 사는 세상이니 참아야 한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데올로기 갈등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자기 판단이 있고 그걸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니 내가 자유를 중시한다고 해서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을 욕하지 말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호등, 그러니까 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은 지켜져야 한다. 나는 그 기준을 유지하는 게 사법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판결을 지켜보면서 매우 착잡한 심경이다. 개인적으론 담당 판사의 판결을 존중하고 싶다. 무려 넉 달간이나 재판을 하면서 모든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당사자들의 진술을 듣고,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을 경청했으니까. 이성과 상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판결을 내렸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아무래도 판결 내용이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교육감 선거의 경쟁자였던 상대방에게 돈세탁하듯 쪼개서 2억원이나 되는 돈을 건넸는데 그게 대가성이 없는 선의였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곽 교육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대가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선거문화의 타락을 초래했으므로 엄벌에 처한다”면서 3000만원의 벌금을 선고해 풀어줬다. 대신 사퇴한 후보는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좀 어이가 없어진다. 이런 걸 엄벌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법률 문외한이니 뭘 모른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수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검 정점식 2차장 검사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을 재판부만 믿는다는 화성인 판결”이라며 “지구인인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나뿐 아니라 정 차장 검사의 말에 신뢰가 간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어이없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전교조는 전임 공정택 교육감이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을 때는 “교육자의 자격이 없다”고 맹비난을 했다. 한데 3000만원 벌금형을 받은 곽 교육감의 석방은 환영했다. 도대체 전교조는 진영논리가 모든 것의 기준인가. 우리편이 하면 무조건 로맨스고 상대편이 하면 불륜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참교육을 주장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그동안 시사평론가 진중권씨가 별로였다. 그는 논리적이지만 말마다 독설에 가까워, 자식을 키우고 나이가 들수록 그런 발언을 듣기가 좀 거북했다. 누구도 세상의 정의와 진리를 독점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게 요즘의 내 생각이다. 한데 곽 교육감에 대해 진중권씨가 트위터에서 제기한 논쟁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는 “나꼼수는 곽 교육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라”고 일갈했다. 안철수씨의 말대로 진영논리가 아니라 합리와 상식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나는 정치풍자로 명망 높은 KBS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의 PD와 작가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개콘의 열성팬이다. 그동안 개콘이 해온 정치풍자에 환호하고 감탄한다. 따라서 곽 교육감 판결처럼 사법부와 진보진영 모두를 맘껏 풍자할 수 있는 소재에 대해서도 아주 수준 높은 풍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정치가 됐든, 풍자가 됐든, 사법부가 됐든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지켜주길 바란다. 물론 언론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자로서, 나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