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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노무현 자전거가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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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이건 혁명이다. 정치판이 완전히 뒤집히고 있다. 지난해 가을 안철수 교수가 갑자기 뜨고,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치 초년병이 당선되고…. 새해 들어선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 64만 시민이 참여해 당(黨) 중심의 권력구조를 뒤엎어 버렸다. 현행법을 위반해 구속된 사람을 석방시키겠다는 ‘정봉주법’이 발의되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선거운동은 제한이 없어졌다. 앞으론 더 큰 변화가 몰려올 형세다. 동원 비용 문제로 주저하던 참여 경선이 대세가 됐다. 4월 총선이 가져올 변화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변화의 방향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정치권뿐만 아니다. 전통 언론매체의 영향력도 허물어지고 있다. SNS에 떠도는 가짜 정보에 주가가 요동친다. 품위 있는 표현은 외면당하고, 지도층 인사들마저 ‘×발’ ‘쫄지마’ 등 반항적 배설문화에 동조하고 있다. 그것은 SNS 때문일 수도 있고, 시대가 바뀐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라예보의 총소리는 내곡동에서 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켰던 가브릴로 프린체프의 총알처럼, 내곡동 땅은 이명박 정부의 위선이라는 거대한 얼음덩이에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어낸 날카로운 바늘이었다. 서울시장 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내곡동 땅 사건은 선거 패배는 물론 이후 보수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내곡동 땅은 결국 아들 문제다. 청와대의 해명대로 보안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편법상속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 재산 331억원을 공익재단에 출연한 대통령이 겨우 상속세 몇 푼을 아끼려고 편법을 사용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만약 세간의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상 만찬 도중 이쑤시개 통을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다 망신당한 것같이 어이없는 일이다. 누군가의 과잉 충성이라 해도 이미 깨져버린 신뢰를 돌이킬 수 없다.

 사람의 근본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용을 써봐야 볼 수 있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움직인다. 용렬(庸劣)한 사람이 제아무리 희생한다고 떠들어도, 제 가족을 위해 몸을 던질 수만 있어도 대단하다. 그런 사람이 공직을 맡으면 모두 불행이다. 자기 딴에는 희생한다는 것이 기껏 쌓아놓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가족을 위해 집어 던지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곡동 땅 거래에 관계한 사람 얘기로는 이 땅은 원래 한 덩어리로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한꺼번에 80억원 정도를 받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저와 경호용 부지의 가격은 따로 붙은 게 아니다. 경호용 부지는 사실 맹지(盲地)에 가깝다. 파는 사람이야 총액만 맞으면 된다. 누가 돈을 더 내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매매를 결정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면 계약이 쉬워진다. 중계업자는 도면을 들고 청와대에 가서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경호차량 여러 대를 대동하고 현지 답사를 해 마을에 소문도 났다고 한다. 거래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정상적인 거래라 하더라도 왜 내곡동일까. 원래 살던 곳도 아니고, 고향도 아니다.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왜 산성을 쌓으려 한 것일까. 경호용 부지는 왜 그렇게 넓어야 할까. 이 대통령은 그 집에 얼마나 살 것이며, 경호가 끝난 뒤 맹지인 그 땅은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혹, MB 권력의 도덕불감증에 대한 실망은 국민 마음속에 울혈(鬱血)처럼 맺혀 계속 보수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은 국가 자산이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 미국에선 외교적으로도 정말 긴요하게 써먹는다. 재임 중 부패를 막기 위해서라도 예우는 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현직에 있으면서 나랏돈으로 아방궁을 짓는 일만은 없어져야 한다.

 전직 대통령은 왜 보통 시민으로 못 돌아가는 걸까. 주변 골목을 모두 막고 시민들과 격리하는 건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족하다. 피를 흘리며 집권한 과거 때문이다. 유폐(幽閉)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불통(不通)의 담을 쌓을 이유는 없다.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 수시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국민 친화적인 전직 대통령이 보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빨간색 수레에 손녀를 태워 자전거를 달렸다. 그 역시 아들의 덫에 걸렸지만 오리를 키우고, 자연농법을 실험하는 농군이 되고 싶어 했다. 대통령의 퇴임 준비는 불통산성을 짓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곡동 땅 문제를 보면서도 노무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친노(親盧)를 부활시킨 건 이 대통령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