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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자유'는 어디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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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s.com 오현아 기자

★민족주의는 허상이다

지난 8월 1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센터. 반세기 동안 서로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떨어져 살아야 했던 남북의 이산 가족이 체제로도, 긴 세월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혈육의 정을 확인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호텔 룸의 크기만큼, TV 모니터의 크기만큼 이들의 만남이 갇혀 있다고 느껴진 적은 없는가. 반세기 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해오다 왜 갑자기 남북 정상이 만나고 이산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지는가.

갑작스러운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남북 화해 분위기를 단순히 민족주의 문제로 환원하기에는 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이승만ㆍ박정희 정권 시절 북한 이야기만 입에 올려도 바로 빨갱이로 몰린 것처럼, 지금 '왜'라는 물음표만 던져도 '민족 반역자'로 눈총 받는 것은 아닐는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 펴냄)라는 도발적인 책을 통해 일찍이 보수 민족주의에 문제제기를 한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임지현 님은 남북 관계를 둘러싼 최근의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임지현 님은 이 책에서 일제 당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민족주의가 해방 이후 억압과 폭력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정희 정권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민중에게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면서 민족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 정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변할 수 있는 혐의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남북 정권이 이산 가족 상봉의 장을 마련한 것이 순전히 '우리는 한 핏줄'이기 때문일까.

★민족이라는 환상…그대와 우리의 억압된 자유

임지현 님이 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를 다룬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아카넷 펴냄)를 펴냈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이용된 민족주의와 일상 속의 파시즘을 비판한 임지현 님이 갑자기 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를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린 8월 마지막 주, 임지현 님이 재직하고 있는 한양대 인문대학을 찾았다.

-폴란드는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예요. 갑자기 폴란드 역사를 책으로 낸 이유가 있다면요?
"폴란드에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은 세기말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민족 문제 논쟁에 관심을 가지면서죠. 연구가 진전되면서 우리나라 역사가 자연스럽게 연상됐어요. 우리나라 역사와 참 많이 닮았거든요. 폴란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조금이라도 객관화가 되지 않겠어요?

-책에서 '민족'의 개념이 상치되는 부분이 있어요. 앞부분에서는 민족이 종족, 종교, 언어, 영토라는 원초적 유대에 기초하는 초자연적인 실재라고 하다가 뒤에서는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 같은데…
"민족의 주술적 힘이 얼마나 허구인지 밝히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서술 방식이에요. 서술 전략이라고 할까? 폴란드인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민족 개념이 결국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17,8세기의 귀족 공화정이 10%의 귀족에게는 완벽한 자유를 주었지만 그 밑에 있는 90%의 농민에게는 연옥일 수밖에 없었어요. "민족주의는 폴란드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였다"는 것은 그 당시 귀족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죠.

-이 민족 개념이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그렇죠. '단군 이래 반만년 단일 민족'이라고 우리는 자긍심을 갖잖아요. 그런데 이게 교육을 통해 고정된 생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국가 권력이 역사를 독점적으로 해석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작년에도 5천년이었으면 올해는 5천1년이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민족을 신화로 만들려면 5천이라는 상징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야만 민족주의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폴란드나 우리나라나 독립 과정이 비슷해요. 외세에 의해 독립했다는…
"두 나라 모두 오랜 기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로 독립을 '얻은' 셈입니다. 해방 이후 폴란드나 우리나라나 지배 계급이 민족을 앞세워 민중을 전유하게 돼요.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고 싶으냐? 민족의 이름으로 뭉쳐라' 그러면 '나의 권리, 일상의 권리'는 내세울 곳이 없게 돼죠. 민족이라는 주술적 효과, 그 환상을 깰 수가 없어요. '민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요. 왜?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으니까요.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 펴냄)에서 일상 속에 내재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박정희ㆍ전두권 정권에 저항했던 운동세력이 정치권으로 속속 영입되고 있잖아요. 민족주의 지배 담론 틀 속에서 사고하고 반항했으니까 변절, 전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이동이죠. 위계 질서와 상명하복의 문화에 길들여 있는 한, 권력과 무관한 상상력을 기대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시민적 민족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나요?
"그렇죠. 지배 담론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삶의 다양성이 표출되고 상호 간에 인정하는 시민 사회가 정착돼야 합니다. 반만년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돼요. 일정한 합의점을 도출하고 시민적 공공성을 뽑아낸다면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도 발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유지하는 틀이 없어진다면 개개인의 다양성이 자리잡기까지 과도기적인 혼란이 오지 않을까요?
"국가 자체를 없애자는 건 아닙니다. 느슨한 행정 체제로서의 국가면 충분해요.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게 깨지지 않으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교과서 싸움처럼 우리 안의 파시즘과 맞서는 게 중요하죠.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만큼 남북 만남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요.
"남북 만남의 배경에 민족주의가 있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벤처는 평양이다'는 말이 있듯이 지독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요. 값싼 노동력 등 북한은 남한 자본에게 중요한 출구예요. 또 북한은 나름대로 체제의 위기를 넘기려는, 담합 구조로서의 통일 방식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북은 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좋아하는 '내연의 관계'였어요. 남한의 수구 반공 세력은 북 때문에, 또 북한의 가부장적 독재 체제는 미 제국주의와 '남한 괴뢰' 때문에 먹고 산 거죠.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이라서 감정적인 차원으로 통일을 논의할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런 논의 없이 통일만 하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대'들의 자유를 향하여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에서 '그대'와 '우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폴란드에서 '그대'는 국가주의로 희생되는 민중과 억압받는 소수 민족을, '우리'는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보수적 폴란드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대'와 '우리'는 무엇인가.

임지현 님은 '그대'와 '우리'를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지금 '그대'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또는 북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대들의 자유가 없으면 우리들의 자유 역시 없다는 사실이다. 민족통일에 신중히 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임지현 님의 책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아카넷 펴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펴냄)
*우리 안의 파시즘 (권혁범 등과 함께 지음, 삼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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