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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hina Forum] 일·중 국교정상화 40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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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분 료세이(國分良成, 게이오대 교수)

전후 ‘일·중 관계’ 개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중 관계는 일본의 관점에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시기는 우연하게도 20년의 주기를 가진다. 첫 20년은 1952년부터 1972년까지.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은 1952년 일화(日華)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만의 중화민국을 정통 정부로 승인했다. 그러나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정권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로 승인했고, 중화민국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를 두고 관례적으로 ‘일·중 국교 회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중화민국을 선택한 단계에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일·중 국교 회복’을 했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그간 대륙을 지배하는 정권으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국교 회복’이 아닌, ‘비정상’의 관계에서 ‘국교 정상화’로 전환했다는 입장이다. ‘국교 회복’이라는 표현이 일상화한 배경은 이렇다. 일본에서는 1952년부터 1972년 사이에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이며, 대륙을 떠난 중화민국과의 국교는 부당하다는 국민적인 ‘국교 회복 운동’이 폭넓게 전개됐던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언급할 1972년부터 2012년까지의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도 일본 입장에서 보면 20년 단위로 나눌 수 있다. 1972년부터 1992년 일왕 방중까지의 시기와, 1992년부터 현재 2012년까지의 시기로 나뉜다. 물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각각의 시기를 또 몇몇 시기로 구분할 수는 있다. 크게 나누면 전반 20년을 ‘일·중 선린우호’를 전개한 시기, 후반 20년을 ‘전략적 호혜관계’를 모색하는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전반 20년(1972-92년) 일·중 관계에서는 일·중 항공협정 조인(1974년), 일·중 평화우호조약 조인(1978년), 엔차관(ODA) 시작(1979년), 교과서 문제(1982년),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1985년), 광화료(光華寮) 판결사건(1987년), 천안문 사건(1989년), 일왕 방중(1992년) 등이 있었다. 역사 인식과 대만 문제 등으로 두 나라 사이에는 마찰이 발생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경제·문화교류를 중심으로 관계가 서서히 확대된 시기였다. 중국은 계획경제를 축으로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기 시작한 단계이며, 덩샤오핑이 일본을 발전 모델의 하나로 상정하고 교류를 확대해 나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중 엔차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대혁명을 마치고 현대화 건설에 나선 사회주의 개발도상국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한 시기이며, 일·중 관계는 개도국과 선진국의 남북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관계구도였다. 그리고 1992년의 일왕의 중국방문은 일본으로서는 불행한 역사를 짊어진 대중외교에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반 20년(1992-2012년)은 일·중간에는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한 경제교류가 급속히 늘어났지만 그와 비례해 갈등관계가 항상 존재했다. 양국 국민 감정은 결국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대만해협위기(1996년), 장쩌민 주석 방일 당시 첨예화된 역사문제(1998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2001-2006년),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참여를 둘러싼 중국의 반일시위(2005년), 중국제 농약 냉동만두 사건(2008년), 센카쿠열도 어선충돌사건(2010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사이 일본은 거품경제가 무너진데다 아시아통화위기와 리먼쇼크 등의 영향으로 경제를 재건하지 못한 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한편 중국은 1992년부터 시장경제노선을 대폭 확대함에 따라 해외의 직접투자를 급격히 늘림으로써 경제성장 시대에 돌입했다. 한때 아시아통화위기의 영향으로 불황에 빠지기도 했으나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순식간에 글로벌 경제 궤도에 올랐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를 유치함으로써, 중국의 GDP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약진했다. 이런 일·중간의 반비례 현상이 양국관계와 양국 국민의 심리적인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음은 물론이다. 즉, 일본과 중국의 관계구도는 더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남북관계일 수 없게 됐다.

일본인의 대중관(對中觀)으로 보는 일·중관계

일본에서는 중국에 대한 복수의 시민 여론조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조사가 매년 실시되는 내각부의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다. 이는 1978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알아보는데 유효하다.
이 통계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최근 30년새 완전히 역전됐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해 가장 친근감을 갖고 있던 시기는 1980년이며, 반대로 가장 친근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 2010년이다. 1978년 일·중 평화우호조약이 조인돼 재계에서 중국 붐이 일어난 직후이며, 1980년에는 NHK의 중국취재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일본 각 가정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10년에는 센카쿠 어선충돌사건 직후 실시한 조사였으며, 이 사건이 중국의 이미지 악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급락한 것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직후이며, 일본인들은 당시 TV영상을 통해 민주화 운동의 탄압을 목격했다. 1990년대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비즈니스 업계가 활황을 경험하면서 이미지가 다소 호전됐으나 2001년 고이즈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가 첨예화됐다. 중국에서는 반일시위가 벌어졌고, 일본의 대중 이미지는 또다시 악화됐다.
여기서 큰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이라고 하면 일·중간 경제교류가 시작하는 단계로, 인적 교류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게이오 대학에 중국에서 제1호 국비유학생이 온 것은 1979년. 일본의 일반인이 대륙에서 온 중국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중국의 정치체제는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이었다. 그런데도 왜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극에 달한 것일까. 반대로 경제면에선 상호 의존관계가 확립됐고, 중국 없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상상할 수 없는 지금, 유학생은 물론 일상적으로 중국인을 만날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혐오감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접촉이 적은 단계에서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지만 교류가 늘어날수록 그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미디어의 영향을 비롯해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의 열쇠는 양국간의 관계를 지탱해온 인적 채널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1972년부터 1992년까지의 일·중 관계는 국민 단위로는 확산되지 않았지만 정치인과 재계 리더들이 중국 각 분야의 리더들과의 채널을 갖고 있었으며, 양국간에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들이 구축한 다양한 채널을 일제히 작동하면 쟁점을 축소하고 사태를 해결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거꾸로 1992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중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 국민 레벨로 확대됐지만, 기존의 각 분야 리더들이 맺은 다양한 채널은 극단적으로 축소됐다. 일본에서는 1972년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지탱해온 자민당의 옛 다나카파가 영향력을 잃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아예 괴멸상태에 놓였다. 이런 가운데 야스쿠니 신사참배문제가 발생했다. 또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 패배와 민주당 정권 탄생은 기존의 채널을 더욱 축소시켰고, 설상가상으로 민주당 정권은 외무성을 비롯한 관료조직에 의존해온 정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메스를 들이댔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는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등이 일본을 발전모델의 하나로 생각할 만큼 특별한 관계로 인식했으나 199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세계 각국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자 중국내에서도 일본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는 지도자가 적어졌다. 즉, 접촉이 늘어날수록 갈등이 증가했는데도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안전망이 확충되지 않았다.

‘1972년 체제’(선린우호관계)에서 ‘2006년 체제’(전략적 호혜과계)로의 이행

이제 일·중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냉전체제가 끝난 1990년대 후반부터 기존의 ‘1972년 체제’를 이끌어온 ‘일·중 선린우호관계’를 시대상황에 맞춰, 보다 전향적이고 대국적인 관계로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런 지향성이 정부의 정책으로 구체화하기까지는 고이즈미 정권이 막을 내리고 2006년 아베 정권의 탄생과 동시에 후진타오 주석과 합의한 ‘전략적 호혜관계’(2006년 체제)가 발표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1972년 체제’는 ‘선린우호’를 슬로건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주요 골자로 했다. 첫째는 냉전체제를 전제로 한 국제환경이며, 일·중관계는 미·중협력을 전제로 한 실질적인 대(對)소련전략이었다. 즉 일·미·중이 소련에 맞서는 구도였다. 둘째가 일·중 관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국 대 개도국이라는 비대칭성의 특징이 있었으며, 일본은 중국의 현대화 건설이 국제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전제하에 엔차관(ODA)를 제공했다. 셋째는 일·중 관계는 침략과 전쟁이라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일·중 선린우호’라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넷째가 대만문제에 관한 ‘하나의 중국’ 원칙이며, 일본측은 이런 중국의 입장을 존중해왔다. 다시 말하면 ‘1972년 체제’는 양국 관계 중심이며, 실질적인 관계도 양국의 일부 엘리트에 의해 유지돼왔다. 또 미국의 존재와 일·미 안보가 중국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6년 체제’는 ‘전략적 호혜관계’를 전제로 다음과 같은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첫째, 국제환경의 변화이자 냉전체제 종식 후 다극화가 진행되면서 글로벌 시장경제가 보급,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이 진행되면서 중국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됐다. 둘째, 중국의 부상과 일본경제의 장기침체로 일·중이 수평관계가 되면서 기존의 비대칭 관계가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GDP면에서 중국이 세계 2위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중국의 돌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셋째, 일·중 관계는 과거에 대한 반성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미래의 관계에 관심이 모아졌다. 중국은 2006년 전략적 호혜관계 확립 이후, 전후 일본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사죄’를 반복한 것을 인정하고 전후 일본이 평화와 발전을 전제로 지금의 번영을 구축했다는 입장을 공식 인정했다. 현실적으로 아시아 지역에는 수많은 공통과제가 있으며, 이들에 대해 일·중이 공통으로 대처할 필요성도 생겼다. 넷째가 대만문제다. ‘하나의 중국’이나 ‘일방적인 현상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는 등의 기본원칙에는 번화가 없으나 대만 자신이 민주화의 길을 걷고, 민진당으로의 정권교체가 가능해지면서 국공합작을 전제로 한 통일목표에서 대만주민의 의사를 반영한 보다 광범위한 문제로 확대됐다. 즉, ‘2006년 체제’의 일·중관계는 다국간주의의 틀을 강화하고 미래지향의 대국적인 관점에서 엘리트뿐 아니라 보다 다원주의의 관점에 기초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호혜관계에 기초한 ‘2006년 체제’를 확립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1972년 체제’의 역사적 경위와 그 의의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뤄져 있지 않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태어난 ‘2006년 체제’의 경위와 의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전략적 호혜관계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양국간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21세기 벽두 험악한 일·중 관계 속에서 태동한 관계안정화를 향한 지혜의 결정체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시절의 산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중국의 후진타오 지도부의 결단이었는지 모르지만 정치권력의 이행기에는 불안정한 면면이 있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전임자가 결정한 외교의 기본방침을 크게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중국에 대한 전략적 호혜관계에 대해 지금의 민주당은 자민당 시절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셋째, 전략적 호혜관계의 정책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금융·무역·투자·안보·재해·환경·에너지·전염병 등 분야에서 구체적인 공통과제를 마련하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넷째, 상호 국민감정이 불안정한 가운데 일·중 관계가 양국 국내 정쟁의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외교에 대한 국내 정치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다섯째, 안전보장 대화나 동중국해의 자원개발 등 두 나라의 가장 민감한 쟁점에 관한 대화와 구체적인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여섯째, 미국의 지역내 존재감과 일·미 안보대화의 의의에 관해 중국 측의 이해를 구해야 하다. 1970-80년대 일·미 안보는 오히려 중국의 현대화 정책을 지원하는데 실질적으로 공헌했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미 양국은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감 있는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반대의사를 나타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일·미 안보는 중국의 대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중 관계는 새로운 20년을 맞이한다. 일·중 관계 40년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을 조금 소개하며 이번 발표를 마무리하고 싶다. 첫째, 일·중 관계는 20년을 지난 시점부터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오히려 갈등이 다변화·심각해졌다. 그런 점에서 한·중 관계가 강화할수록 시련 역시 깊어질 수 있다. 향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대두가 한국의 전체적인 이익과 부합하는 범위에서는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에서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둘째, 그런 점을 고려하면 정상간의 접촉과 교류의 장을 정례화, 또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그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외교의 계속성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셋째 한·미동맹은 한국의 외교의 기둥이다. 그 점은 일·미 동맹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지속적으로 발신할 필요가 있다.
한·중관계와 일·중관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북한이라는 제 3국의 존재다. 중국은 앞으로도 현실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북한과의 등거리 외교를 전개해야할 것이다. 다만 그 점은 한국에는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과 북한 관계의 중요성과 끈끈함을 감안하면, 한국은 중국을 통해 북한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중국은 그다지 달갑지 않겠지만, 6자회담의 의장국인 중국은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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