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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선거냐, 점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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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 정치외교학

금년은 선거의 해다. 세계적으로 58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고 한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도 모두 정치권력에 변화가 일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외신들은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부작용인 1% 대 99%의 양극화 현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재정위기로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총리가 선거 없이 교체됐다. 대의제(代議制) 민주주의 자체가 불신의 도마에 올라 있다. 그래서 선거 대신 점거가 2012년을 장식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런 정치 불신의 파장은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어 보인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위기는 결코 개별 국가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은 지금 외부 세력에 의해 점거된 상태다. 둘 다 해체될지 재편될지 심각한 갈림길에 서 있다. 그래서 선거의 정치가 다시 부활할지, 아니면 점거의 정치에 점령당할지 초미의 관심사다.

 정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공직 후보자를 선출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당 공천이나 정당 지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는 아이러니가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의원이 의정보고서에서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사실을 삭제했다 한다. 작금의 정치 현실에서 정치인들에게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정치의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기 쉬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의 우려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일본 말로 선거나 점거는 모두 “센쿄”로 발음된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신년 특집 “무너지는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아닌 점거’가 2012년의 세계를 장식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이 땅에 떨어진 일본이다. 더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발생한 큰 정치적 사건은 거의 예외 없이 모방해온 일본이다. 세계의 금융 중심지 뉴욕의 월가 점령이 언제든지 도쿄에서 재현될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왜 이런 움직임이 우리의 눈길을 끌까? 그것은 그동안 유행했던 ‘거리의 정치’와 다른 양상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리더를 통한 운동도, 조직을 통한 운동도 아니다. 통일된 목표나 강령도 안 보인다. 그 대신 참가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며 문제를 결정하는 자발적인 운동이다. 시장의 난폭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의민주주의의 심장부를 겨냥한 직접민주주의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대의 82.9%, 30대의 84.6%가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불만의 표적은 말할 것도 없이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현실 정치다. 다름 아닌 ‘현실 대의민주주의’의 통치 능력에 대한 불신인 것이다. 이들의 불신이 어디로 향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현실정치에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나머지 좌파나 우파의 포퓰리즘에 휩쓸릴 수도 있으며, 또 월가의 시위처럼 점거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운동으로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외친 것은 1989년. 그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모두 행복하게 살 것으로 믿어왔다. 자본주의가 번성하고 대의민주주의가 활성화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역사의 종언은 ‘어제’의 승리로 끝장났다. 이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점철된 오늘과 내일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하지만 과연 정치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통치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비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작금의 비틀거리는 우리 정치를 보면 기대난이다. 정치의 중심이 상실된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아닌 점거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치가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지 못할 경우 뉴욕의 월가 점령처럼 여의도의 금융가, 아니면 서초동이나 양재동의 기업타운이 점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돈을 벌면 모두 기업경영진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손해를 보면 모두 일반 서민에게 덮어씌우는 자본주의는 정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점거 세력을 열광시킨 말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에 이 열광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제도권 정치가 바로 이 힘을 테스트받고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 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