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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권대국’으로 부상하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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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02면

#. 1995년 겨울 중국 동북 3성의 중심도시 선양(瀋陽)에 갔을 때였다. 석탄 연기가 매캐한 아침 7시쯤 번화가 시타(西塔) 거리에서 카키색 제복의 공안(公安·경찰)이 20대 젊은이를 복날에 개 패듯 하고 있었다. 행인 100여 명이 서서 구경했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10여 분가량 때린 뒤에야 공안은 젊은이를 보내 줬다. 구경꾼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자전거 도둑인 줄 알고 의심했는데 아닌 걸로 판명됐다”는 설명이었다. 젊은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제 갈 길을 갔다. 행인들도 말없이 흩어졌다. 그 후 중국에서 공안 제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지는 건 아마도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일 것이다.

이양수의 세상탐사

#. 중국 외교부의 아시아 담당 국장이 최근 “(서해상에서 중국 어민과 한국 해경의 충돌 발생 시)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실무책임자의 말이라 느낌이 묵직하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단속하다 이청호(40) 경장이 흉기에 찔려 살해된 게 불과 3주 전인데 말이다. 하기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사건 직후 유달리 ‘인권’을 강조했다. “중국 어민에게 합법적 권익 보장과 더불어 인도주의적인 대우를 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사이 중국 어민 3000만 명의 인권이 엄청나게 신장된 게 틀림없다.

중국이 인권대국이 되겠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하지만 반체제 미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에게 탈세 혐의를 씌워 거액의 벌금을 매기는 걸 보면 중국에서 인권은 이중잣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국 정부가 자국 어선의 불업조업에 대해 ‘어민 인권’을 앞세우는 것도 아이웨이웨이 사례만큼 어이가 없다. 인권 문제는 G2(미·중) 시대에 걸맞지 않은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다. 미국의 국가별 인권백서에 맞서 90년대부터 중국식 인권백서를 발표해 맞불을 놓는 것도 극도의 불쾌감 때문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제창한 ‘평화공존 5원칙’ 중 세 번째인 ‘내정 불간섭’ 명분을 깔고 있지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미국과 친밀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향해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외교적 수사법을 구사해 왔다. 쉽게 말해 정치체제나 종교, 동맹관계가 다르지만 ‘경제 발전’이라는 공통분모를 발판으로 갈등을 극복해 나가자는 취지다. 한·중 수교 20년간 양국이 지켜온 외교의 큰 틀(frame)이었다.

‘10대 경제대국’에 근접한 한국은 중국의 ‘구동존이’를 곧이곧대로, 신줏단지처럼 떠받들었다. 탈북자 강제 북송에도, 재중 한인들의 억울한 처벌에도, 양국 간 문화·역사분쟁에도 애써 눈을 감았다. 그뿐 아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劉曉波) 변호사를 비롯한 민주인사 탄압이나 소수민족·파룬궁(法輪功) 문제, 달라이 라마의 방문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인권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국익 때문이라지만 바깥엔 ‘조용한 외교’가 아니라 ‘비겁한 외교’로 비춰졌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의 그런 모습을 중국 지도부는 높이 평가했을까.

이명박(MB) 대통령이 9일부터 사흘간 중국을 국빈 방문한다. 이번이 여섯 번째 방중이다. 한·중 수교 20주년에다 김정은 북한체제 출범까지 겹쳐 이래저래 주목받는 이벤트다.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안보 고위직을 역임한 한 인사는 “중국은 이명박 정부의 친미 행보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대통령에 대해 냉랭한 자세를 견지해 왔다”고 설명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한·중 정상끼리 외교적 의례를 뛰어넘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의식했는지 우리 외교부는 다시 ‘침묵 모드’에 들어갔다. 중국 측의 적반하장 같은 발언에도 그 흔한 대변인 성명조차 내지 않고 있다. ‘영토와 주권의 존중’은 반세기 전 저우언라이가 제창한 ‘평화공존 5원칙’ 중 첫 번째다. 중국이 ‘어민 인권’으로 얘기한다면 왜 ‘해경 인권’으로 당당하게 응답하지 못하는가. 막가파 식으로 저항하는 불업조업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중국 공안을 우리 함정에 동승시켜 공동단속을 하는 방안도 제안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침묵외교는 이제 재검토할 때가 됐다. 상대가 ‘패권외교’로 가고 있는 마당에 침묵은 더 이상 금(金)이 아니다. 이 대통령에게 원칙과 지혜를 겸비한 대중 외교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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