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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성경 번역한 골방 한쪽 낡은 책상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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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34면

글자는 무기다. 세종도, ‘밀본’의 정기준도 글자는 무기이자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최고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글 창제를 두고 이 둘이 보여준 ‘끝장 토론’은 누가 그 ‘힘’을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다.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댕긴 마르틴 루터(1483~1546)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믿음은 말씀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그 말씀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했다. 사제만 읽는 라틴어 성경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후 그가 기사로 변장해 1년 가까이 숨어 지내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곳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이다. 이 성은 독일 중부의 고즈넉한 전원도시 아이제나흐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종교개혁 성지, 독일 바르트부르크 성을 가다

가난한 이 돕다 쫓겨난 엘리자베트 성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여전히 중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아이제나흐. 이곳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루터는 이곳을 ‘나의 사랑하는 도시’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시내 곳곳에는 조각가 아돌프 폰 돈도르프가 1895년 만든 루터 동상을 비롯해 그가 14세 때 성가대에 섰던 성 게오르그 교회와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 루터가 1498년부터 3년간 하숙했다는 루터하우스 등 다양한 흔적이 남아 있다. 시내에서 10여 분간 버스를 타고 가파른 비탈길을 달려 언덕 위 성곽에 도착하니 심한 비바람에 우박마저 떨어진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이제나흐 시내는 어스름 안갯속에 잠겼다. 성곽 안쪽으로는 이 산에서 잡힌다는 오소리, 곰 등 야생동물의 가죽이 널려 있다. 험한 날씨에도 성 안은 순례객들로 부산했다. 인상 좋은 독일인 가이드가 한국어 해설이 흘러나오는 카세트를 들고 길잡이로 나선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독일의 3대 고성 중 하나다. 199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중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중세 건축유물이다. 11세기 중엽 튀링겐의 영주 루트비히 폰 샤우엔부르크 방백이 터를 닦았다. 18세기까지 증축이 계속된 덕분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르네상스 등 서로 다른 모양새의 건물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성을 거쳐간 주요 인물 중 하나가 성 엘리자베트다. 헝가리 공주로 1211년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해 이 성에 왔지만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다 추방당한 후 평생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구제와 구휼의 성녀’다. 화려한 모자이크화로 방 전체를 메운 ‘엘리자베트 방’과 14개의 프레스코화로 일생을 묘사한 ‘엘리자베트 회랑’이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위해 옷자락에 숨긴 빵이 장미로 변했다는 ‘장미 기적의 전설’과 성인으로 추대돼 유해가 높이 올려지는 그녀의 그림에서 문득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는 가르침과 함께.

1 종교개혁 500주년에 앞서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는 독일 튀링겐 주의 ‘The Luther Decade’ 포스터.2 바르트부르크 성 전경.3 아이제나흐 시내의 루터 하우스.4 바르트부르크 성 내의 ‘루터의 방’.

루터의 방’에는 융케 게오르그라는 기사로 변장해 머리와 턱수염을 기른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 아래 작은 나무 책상에는 그 자리에서 번역한 ‘9월 성경’이 펼쳐져 있다. 이 작은 골방에서 고난의 시간을 견디며 써내려간 이 낡은 책 한 권이 종교개혁과 기독교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순하고 소박한’ 언어로 쓰인 성서를 성직자의 도움 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신약 번역을 1521년 12월 마치고 이듬해 출판한다. 마침 구텐베르크가 선보인 인쇄술(1454)의 도움을 얻어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온 유럽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가게 된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가 탄생한 곳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은 루터의 또 한 가지 역할은 음악이었다. 어릴 적부터 플루트와 류트를 능숙하게 연주했던 루터는 “인간의 악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음악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며 예배 의식에서 음악의 비중을 높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등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복음 찬송 30여 편을 직접 작곡했다. 사제와 성가대만이 라틴어 성가를 부르던 종래의 예배와 모든 회중이 간결하고도 장중한 선율의 코럴을 합창하던 루터교의 예배-. 음악이 주는 감동이 신앙심 고취에 기폭제가 되었음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소작인, 광부, 가정주부, 아이들과 시장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감화시킬 수 있는 성경과 음악으로 루터는 세상을 바꾸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이 성을 사랑한 괴테가 지었다는 박물관에는 루터가 연주하던 류트가 전시돼 있었다.

사실 이 성은 12~13세기 음유시인과 가수들이 모여든 중세 문화의 중심지다. ‘가수들의 전쟁’이라 불리던 미네징거 경연대회인 ‘장거크리에크’가 열렸던 ‘가요실’도 보존돼 있다. 당시의 살벌했던 경연대회의 전설을 그린 벽화를 보니, 가수들을 모아놓고 순위를 매겨 꼴찌를 탈락시키는 요즘의 방송 포맷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회 주최자인 백작을 찬양하지 않은 가수가 탈락자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다는 이 벽화의 전설이 1842년 이 성을 방문한 바그너에 의해 오페라 ‘탄호이저’로 탄생했다. ‘탄호이저’는 지금도 이 성의 가장 크고 화려한 방 ‘축회장’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공연된다.

성을 나서자 날은 저물고 안개는 더 짙어졌다. 성채는 구름 위에 떠있는 듯 초현실성을 더한다. 군청빛으로 깔린 어둠을 주황빛 가로등이 밝혀주는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며 루터의 책상을 떠올린다. 초라한 골방에서 감내한 희생은 거룩한 십자가의 감동을 전파하는 기적의 밑거름이 되었다. 종교개혁 500년, 오늘의 종교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을까? 권력을 세습하고 세를 확장하기 바쁜 대형 교회들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에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종교가 더 이상 사랑을 실천하지 않던 500년 전 그때에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사랑은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성 엘리자베트와 루터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한 바르트부르크 성이 들려 준 이야기다.
취재협조 독일관광청 서울사무소, 대한항공, 레일유럽

아이제나흐 가는 길
유럽 한복판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프랑크푸르트까지 직항하는 대한항공 항공편을 이용한다. 프랑크푸르트시내를 돌아본 뒤 초고속열차 ICE를 타고 괴테가도를 달리면
1시간30분 만에 튀링겐 주의 아이제나흐에 도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여행을 더 즐기고 싶다면 괴테가도를 타고 돌아오다 메르헨가도의 출발점인 그림형제의 도시 하나우에 들르는 것도 알찬 여행코스다. 매년 해가 바뀌는 순간 서로 위치를 바꾼다는(!) 그림형제 동상과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었다는 필리프스루헤 궁전 등이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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