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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MB, 남북 경색을 결자해지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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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대통령 신년사가 나오기 사흘 전, 정부 고위 소식통은 “그동안 우리가 천안함에 옥죄어 있었다. 천안함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4년 동안 대북 강경노선을 유지한 걸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고해성사요, 김정일 사망을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로 살리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천안함과 연평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천안함에 대한 북한의 사과 없이는 남북관계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서 5·24 대북제재의 채찍을 든 이 대통령이 북한에 과감한 유화의 손을 내민 것이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김정일 사망이 우리에게 ‘출구’를 제공했다. 김정일은 사과 대신 목숨을 바쳤다. 아버지의 빚을 아들에게 갚으라고 할 수는 없다”고까지 말했다. 해석하자면 김정일이 천안함의 업보를 안고 갔으니 사과 문제는 남북한 큰 틀의 대화에서 최소한의 수준으로 정리하고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남한은 지난해 5월 남북한 베이징 비밀접촉에서 그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그때는 김정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화들짝 놀란 북한 측 참석자들이 회의 내용을 폭로하는 촌극을 벌였다. 천안함·연평도 사태의 최고책임자인 김정일이 무대에서 사라졌으니 사정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정부 고위 소식통의 말과 이 대통령 신년사의 밑바탕에 깔렸다.

 이것이 대통령 신년사의 북한 부분이 나온 배경이다. 그래서 천안함·연평도에 대한 언급의 생략은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 오히려 명명백백하고 시기적절한 대북 화해 메시지요, 무언의 대화 재개 제의다. 북한이 김정일 사망 이후 연초까지 쏟아낸 이명박 대통령 비난 성명을 보고 통일부 장관 이름으로 나온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부의 위로의 말과 대통령 신년사는 희망사항에 근거를 둔 환상 좇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평양발 성명들을 자구대로 해석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국방위원회 성명은 온 민족이 겪고 있는 국상 앞에서 천추만대를 두고도 씻지 못할 대역죄를 저지른 “이명박 역적패당과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북한 신문들의 신년 공동사설도 얼추 그런 수준으로 남한을 공격했다.

 그러나 국방위 성명과 공동사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애도 분위기에서 나왔다. 당·군·정부 기관들은 큰 소리로,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게 슬퍼해야 하는 초상집 분위기다. 슬픔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와 개인은 인륜에 대한 대역죄인 취급을 당한다. 조의를 표하지 않고 조총련계 한인들의 방북 조문을 못하게 한 일본 정부도 당연히 매도의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살벌한 공기도 정화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항상 남한 공격의 선봉에 서는 ‘우리민족끼리’의 3일 성명은 놀랍다. ‘우리민족끼리’는 주로 이 대통령 신년사에 대한 민주통합당 대변인 성명을 인용하면서 “오늘 리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 사실상 마지막 <신년사>는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이… 국민들에게 또다시 깊은 절망감만 남겨주었다”고 논평했다. 역적패당 어쩌고 하는 극한 용어를 쓰지 않고 괄호 속에서라도 리명박을 <대통령>으로 호칭했다. 그것은 민주통합당 대변인 논평과 비판의 수준이 같다.

 이걸 두고 북한이 남한의 화해 신호에 긍정적으로 화답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얽매인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북한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관심 있게 기다린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김정일 사망으로 남북관계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새 시대의 방향이지만 그건 상당 부분 우리 하기에 달린 것이다.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 재개를 위해 이산가족 상봉과 식량지원을 묶는 시안(試案)을 궁리 중인 것 같다. 상봉에 나오는 북한 가족 1명에 쌀 5t 정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쌀 5t이면 30명이 한 해 먹고 남을 식량이다. 그런 협상이 성사되면 북한은 5t 이상을 요구할 것이다. 수량에 유연할 필요가 있다. 남한의 진보들은 사람이 먹을 쌀을 주는데 무슨 사람 숫자 따지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고, 보수들은 결국 식량 퍼주기를 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1년밖에 안 남은 이명박 정부는 이번만은 좌우 눈치 보지 말고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만을 생각하고 대화에 올인해야 한다. 이 시기에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도 좋은 징조다. 천안함 책임자가 사라졌다. 남북 경색에 책임이 큰 이명박 정부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각오로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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