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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나 신입이나 같은 크기 방 하나씩 … 최고 기업 비결 숨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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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소프트 파워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온다. 체스판이 준비된 SAS 본부 건물 앞 정원.

온라인 게임 리니지 개발자인 이희상 엔씨소프트 부사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천재형 프로그래머다. 엔씨소프트에서 일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이 부사장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과 미국 게임업체를 방문했다. 김 사장이 상담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 자판만 두드리고 있었다. 김 사장은 ‘중요한 미팅인데 왜 저러나’ 하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이 부사장은 미국 업체에서 요구한 프로그램을 내밀었다. 개발팀이 달라붙어 보름쯤 걸릴 일을 회의 중 만들어 내는 것을 본 미국 업체는 엔씨소프트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소프트 파워는 이렇듯 천재 한 명이 1만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대표적 분야다.

◆특별취재팀 서울=김창우·박태희·정선언, 캐리(미국)=박현영, 텔아비브·하이파(이스라엘)=이수기, 뮌헨(독일)·니스(프랑스)=심서현 기자

소프트웨어(SW) 업체 SAS 본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캐리에 있다. 넓이 3.6㎢(110만평)의 우거진 숲에 드문드문 들어선 낮은 건물은 회사라기보다는 대학 캠퍼스 분위기다. 지난달 20일 이곳을 찾았다. 캠퍼스 투어를 안내한 직원은 “일부러 평균 800m 간격을 두고 설계했다”고 말했다. 회의나 업무를 위해 다른 건물을 찾을 때 걸으면서 생각하기 딱 좋은 거리다. 책상에 앉았을 때와는 또 다른 자극을 받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돕기 위한 배치다. 길가에는 조각품과 설치미술 작품 4000점이 놓여 있다. 한낮 근무시간인데도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직원들이 눈에 띈다. 캠퍼스에는 총 64㎞의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캠퍼스에는 보육원과 병원·상담소·피트니스센터도 있다. 상담소에는 직원들이 고민을 의논하는 상담사가 상주한다. 자녀 교육이나 건강·재정 같은 개인 문제뿐 아니라 상사와의 관계를 포함한 업무 상담도 한다. 대외커뮤니케이션팀 직원 앨리슨 하먼 레인은 최근 어머니가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담소부터 찾았다. 그는 “치료 방법, 병원 선택, 비용 마련 같이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해 어머니의 재산 정리 문제까지 필요한 정보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직접 알아봤다면 사나흘 이상 걸렸을 일을 한 시간 만에 해결할 수 있었다.

 SAS에서는 전문의 4명을 포함한 의료진뿐 아니라 상담사·운전기사·요리사·정원사·전속 예술가까지 모두 정직원이다. “SW회사의 자산은 사람”이라는 짐 굿나잇 최고경영자(CEO)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 회사는 말단 직원에서 CEO까지 모든 직원에게 같은 크기의 사무실을 하나씩 준다. 프라이버시 존중의 의미도 있지만 진급해서 개인 사무실을 갖는 걸 회사 생활의 목표로 삼지 말라는 메시지다.

미국 캐리에 자리 잡은 소프트웨어 업체 SAS는 회사 안에 언제든지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총 64㎞의 산책길을 만들어 놓았다.

아울러 직원들의 창의력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모조리 제거하면서 최상의 업무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애써 왔다. 이렇다 보니 이 회사 이직률은 4~5%에 불과하다. SW업체 평균 이직률인 15~20%의 4분의 1 수준이다. 특히 금융위기가 닥친 2009년과 2010년에는 가장 낮은 2%대를 기록했다. 2010년과 2011년 연속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1위에 뽑히기도 했다.

 ◆이스라엘 “시험에도 정답은 없다”=나라 전체가 소프트 파워에 집중하는 곳도 있다.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SW 관련 산업은 이스라엘의 주요 수출원이며, 전체 정보통신기술 산업 중 46%를 차지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3000개의 SW 관련 회사가 있으며 이 중 120여 개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이스라엘은 내수 규모가 작기 때문에 SW 기업들은 창업 초기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품을 개발한다. 지난달 6일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에서 만난 지오라 야론 교수는 “SW와 관련한 어떤 아이디어든 이를 사장시키지 않고 창업으로 연결해 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힘”이라고 소개했다.

 대학 교육도 창업에 맞춰 이뤄진다. 7일 만난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의 에란 야하브 교수는 “이스라엘 공학 교육의 강점은 극단적인 수준의 열려 있음”이라고 했다. 노벨화학상을 받은 다니엘 셰흐트만 교수가 몸담고 있는 테크니온 공대는 이스라엘의 MIT라 불리는 명문이다. 이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이 수업뿐 아니라 자신의 창업과 관련한 문의를 해와도 언제든 성심성의껏 응해 준다. 미국 IBM에서 6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이 대학으로 옮긴 야하브 교수는 “시험에도 정해진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생이 자기 생각의 흐름을 정확히 보여줬다면 얼마든지 A학점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진짜 기업 현장에는 답이 없으며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업계도 마찬가지였다. 8일 이스라엘 래빈 사이언스 파크 내에 위치한 사피엔스사의 사무실. 20여 개의 방은 모두 문이 열려 있었다. 캐주얼 차림의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직급을 따지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기술경영자(CTO)인 사기 쉬레저는 “흔한 농담 속에서도 제품 관련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청바지 차림의 프로그래머 슈물릭 티모르는 회사 공동창업자 앞에서도 “2주만 재미 없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회사를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엔지니어와 개발자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기보다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개발업체 대표는 금요일 오후에 클라이언트로부터 ‘새로운 기능을 넣고 싶은데 월요일에 보자’는 연락을 받은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월요일에 회의에 참석하니 ‘왜 해결책을 갖고 오지 않았느냐’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며 “다음부터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직원들과 주말 내내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KT의 앱개발 지원공간인 서울 우면동 ‘에코노베이션 센터’에서 개발자들이 앱을 테스트해보고 있다.

 ◆KT ‘SW 제값 주기’ 큰 반향=국내 기업들은 이제야 소프트 파워에 눈을 떴다. KT는 지난해 ‘SW 제값 주기’ 제도를 도입했다. 구매 방식도 기존의 용역구매에서 가치구매 방식으로 전환했다. 용역구매란 SW 가격을 개발인력 인건비로 산정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이 채택하고 있다. SW 개발자가 단순 인력과 같은 대접을 받는 셈이다.

KT는 이 같은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한 가치구매 방식은 SW 기업의 전문성, 해당 SW의 미래 시장성 등을 기준으로 비용을 산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KT가 넥스알과 개발 중인 클라우드 기반 로그분석 솔루션은 인건비 기준으로 판단하면 10억원 수준이지만, 가치구매 방식으로 산출한 가격은 20억원을 웃돈다. 이 회사의 송정희 SI부문 부사장은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가 한국에서 일했다면 단순 기술자 취급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라며 “인건비로 SW 가격을 산정하는 관행을 과감히 끊겠다”고 말했다. 가치구매 방식은 올해 300억~500억원 규모로 시작해 2015년에는 연간 3000억원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다.

아울러 KT는 올해부터 SW 가격을 최대 50%까지 미리 지급해 중소기업의 개발 여건을 개선하기로 했다. 이렇게 개발한 SW의 지적재산권 또한 개발 기업에 줄 방침이다. KT에 공급하려고 개발한 SW라도 다른 기업에 판매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중소 SW기업의 개발을 지원하는 ‘클라우드 인큐베이션 센터’, 이들이 SW를 판매할 수 있는 ‘기업용 SW 오픈 마켓’도 구축한다. 이석채 KT 회장은 “한국에도 오라클이나 SAP 같은 세계적인 SW 기업이 탄생해야 한다”며 “KT가 앞장서 변화의 토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정보기술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회사 밖에서 그 답을 찾는다. 한양대에 소프트웨어학과를 설립하고 서울대와 함께 소프트웨어공동연구센터를 세웠다. LG전자는 내부 역량 강화에 나섰다. 구본준 부회장이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면서 만든 ‘1등 SW위원회’가 대표적이다. CTO를 위원장으로, 각 사업본부가 공동 프로젝트를 발의해 개발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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