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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음모론 쏟아내는 국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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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한 사건’(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이다. 말로만 듣던 북한 급변 사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상 시기에 열린 23일 국회 남북관계특별위원회에선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이나 유언비어에 가까운 주장들이 쏟아졌다.

 미래희망연대 송영선 의원은 북한의 공식 발표를 문제 삼았다. “김정일은 야행성이다. 새벽 2~4시에 잠자리에 들곤 하는데 그 시간에 열차를 탔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열차에서 죽지 않았고, 시간도 16일 오후 6시”라고 주장했다.

 마치 곁에서 본 것처럼 말했지만 류 장관은 “북측 발표를 뒤바꿀 만한 증거는 없다”고 부인했다. 한나라당 김세연 의원도 “사망 시점이나 장소에 대한 논란은 본질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전날 국회 본회의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박선영(자유선진당) 의원=김 위원장은 아침 8~9시에 일어나 마사지를 받지 않고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반신불수다. 그런 사람이 오전에 열차에서 숨졌다는 건 100% 허구다.

 ▶김동성(한나라당) 의원=김 위원장은 16일 저녁 8시 평양 관저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의 발표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김 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김·송 두 의원은 탈북자를 들었고, 박 의원은 ‘중국 쪽 정보원’이라고만 했다. 일부 의원이 루머 수준의 발언을 쏟아내자 정부 당국자는 “북·중 접경지대에서 전해오는 풍문들을 확인이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막 지른다”며 “한참 바쁜 외교안보장관들을 불러다 소모적인 추궁을 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날 국회 남북관계특위를 지켜본 시민들도 본지에 전화를 걸어 “극도로 예민하고 중요한 때에 외교장관과 국방장관, 통일장관이 몇 시간씩이나 국회에 잡혀 있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이제 이런 모습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회 정보위 소속 민주통합당 간사인 최재성 의원도 “김 위원장의 아침 기상시간까지 거론한 건 과했다”며 “섣불리 의혹을 제기하다간 국상(國喪) 중인 북한을 자극해 남북 긴장만 고조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중대 안보 사안의 세부적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건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근거가 확실하지도 않은 ‘한건주의’식 폭로에 열중하느라 놓치고 있는 게 있다. 바로 한반도 긴장완화와 통일을 위한 장기전략이다. 국회가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할 사항이다.

윤덕민 교수는 “한반도에 닥쳐올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중장기적 전략을 제시하는 게 국회가 해야 할 일”이라며 “지금 세계는 온통 우리만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미 유연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안정되면 남북관계에서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밝히고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북정책이란 워낙 포괄적이고 거시적이어서 방향을 틀 때도 급커브가 아니라 완만하게 큰 곡선을 그리며 도는 법이다. 이때 미묘한 변화를 놓치면 큰 흐름에서 뒤처질 위험이 있다는 게 대북관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새 질서에 따른 새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통독(統獨)을 이끈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분단 시절 통일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에 통일독일이 좋은 이웃나라가 될 것임을 천명하며 드러내지 않고도 꾸준히 설득했다. 또 통일에 반대 입장이던 구 소련과는 경제원조를 통해 우호관계를 쌓았다. 국가 차원의 컨센서스에 바탕을 둔 장기적 통일전략이 있었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은 만큼 루머의 확대재생산보다는 장기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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