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LB] 명예의 전당 (11) - 바비 도어

중앙일보

입력

바비 도어가 명예의 전당 멤버라는 영예에 어울리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분명 그는 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인 펜웨이 파크를 벗어나서는 특별히 좋은 타력을 보이지 못했다. 80년대에 보스턴 레드 삭스를 대표하는 타자였던 웨이드 보그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린 몬스터'를 이용하는 타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판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또한 그는 13시즌만을 소화한 뒤 은퇴하여 내세울 만한 누적 기록이 별로 없으며 통산 타율도 .288로 특출하다고는 할 수 없다. 도어가 동시대에 같은 2루수로 활약하였으며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조 고든에 비해 더 나은 선수였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2루수로서는 대단한 장타력을 갖추었으며 뛰어난 수비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풋아웃 부문에서 4회나 리그 1위에 올랐으며, 어시스트 등에서도 항상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또한 연속 경기 무실책 부문에서는 두 번에 걸쳐 리그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또한 그는 항상 큰 슬럼프를 겪지 않고 꾸준한 성적을 올렸으며, 9차례나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팀에 테드 윌리엄스라는 위대한 타자가 없었다면 도어가 40년대에 레드 삭스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었으리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다.

도어는 1934년에 마이너 리그 중 하나인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헐리우드에 입단하여 프로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 팀은 1936년 샌디에이고로 이동하였고, 같은 해에 샌디에이고 토박이인 18세의 윌리엄스가 이 팀에 입단하였다. 도어는 이 때부터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윌리엄스의 그늘에서 지내야 했다.

당시 레드 삭스의 단장이던 에디 칼린스는 쓸만한 선수를 찾아 서부 원정에 나섰고, 샌디에이고에서 명성을 떨치던 도어와 윌리엄스를 발견하여 스카우트하였다. 그리하여 이 두 선수는 1937년부터 빅 리그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도어는 1937년에는 5경기에 출전하는 데에 머물렀으나, 이듬해부터는 주전 2루수로 기용되었다. 그는 1938년에 .289의 타율을 기록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3할 타자가 되는 동시에 12개의 홈런을 날렸다.

도어는 1940년에는 22홈런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2루수로서는 놀라운 수치였다. 또한 그는 이 시즌에 105타점을 올려 이 부문 7위에 랭크되었다. 이로써 그는 쇠퇴기를 맞고 있던 지미 팍스의 뒤를 이을 팀의 간판 타자로 부각되었다.

그는 1941년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으며, 1942년에는 리그 8위에 해당되는 15개의 홈런을 날렸고 102타점으로 이 부문 5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3년에는 올스타전에서 AL에 승리를 안기는 홈런을 날리기도 했으며, 홈런 부문 7위에 랭크되었다.

1944년, 도어는 8월 중순까지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 해에 처음으로 장타율 부문에서 리그 수위를 차지하였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루 부드로를 제외한 어떤 AL타자보다도 높은 .325의 타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어 8월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

도어는 시즌 중 유력한 MVP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시즌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바람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좌완 투수 핼 뉴하우저에 밀려 수상에 실패하였다. 또한 시즌 중반까지 우승을 노리던 레드 삭스는 도어가 빠지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도어가 돌아온 것은 1946년이었다. 그는 이 해에 116타점과 16홈런을 기록하여,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하였다. 1920년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넘긴 뒤 월드 시리즈를 밟지 못하고 있던 레드 삭스는 이 시즌에 드디어 리그 정상에 올랐고, NL을 대표하는 강타자 스탠 뮤지얼과 이너스 슬로터 등이 버티고 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격돌하게 되었다.

도어는 시리즈에서 22타수 9안타(타율 .409)의 맹타를 휘둘렀고, 4차전에서는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졌고, 결국 도어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고 있던 자니 페스키가 슬로터의 모험적인 홈 쇄도를 저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레드 삭스는 패배의 아픔을 맛보았다.

1947년에 도어는 95타점과 17홈런을 기록하였고, 이듬해에는 생애 최고 기록인 27개의 홈런을 날렸다. 이 시즌에 레드 삭스는 다시 월드 시리즈 진출을 노렸으나, 결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리그 우승을 양보했다.

1949년에 통산 3번째로 3할대 타율을 기록한 뒤, 도어는 1950년에 11개의 3루타를 기록하여 이 부문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또한 그는 이 해에 2년 전 세운 자신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으며, 생애 최다인 120타점을 올렸다.

그러나 1951년, 그는 등 부상으로 106경기에 출장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그는 이 해에 33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는 은퇴 후인 1967년에 레드 삭스의 코치를 맡아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공헌하였으며, 그 후에는 토론토 블루 제이스에서 1981년까지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명예의 전당 원로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헌액의 영광을 안았다.

로버트 퍼싱 도어(Robert Pershing Doerr)

- 1918년 4월 7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출생
- 우투우타
- 1937년 ~ 1951년 보스턴 레드 삭스 2루수
- 명예의 전당 헌액 연도 : 1986년
- 통산 성적 : 타율 .288, 2042안타, 223홈런, 1247타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