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은 변화 기다려 … 남북 경협 연착륙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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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그로하 주한 유럽연합상공회의소(EUCCK) 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19일 본지
와 인터뷰를 하고 향후 남북 경협 전망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7년을 평양에서, 19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2002년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도 주선했다. 장자크 그로하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EUCCK) 소장의 이력이다. 그는 분단된 남북한 생활을 모두 체험한 ‘한반도통’ 프랑스인이다. 프랑스 농식품부에서 근무하다 중국으로 연수를 갔고, 북한 지하자원 수출 업무를 하던 홍콩 북아시아컨설팅의 사장으로 발탁돼 1986년부터 92년 말까지 평양에서 살았다.

 19일 서울 을지로 EUCCK 사무실에서 만난 그로하 소장은 “북한 사람들은 세뇌되지 않았다.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단언했다. “북한 정부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빠르게 이해한다. 다만 이제까지 그 툴(도구)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앞으로 북한에 어떤 일이 전개될까.

 “곧 김정은이 다음 지도자로 공식화될 것이다. 부드럽게 이 권력이양을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김정은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다. 따라서 장성택 같은 인물이 김정은의 뒤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김정은을 지원하는 팀이 완성되어 내부 동요를 잠재우고 권력이양 작업을 할 것이다.”

 - 남북 관계나 경제협력을 어떻게 전망하나.

 “장기적으로 남북한이 보다 정상적 관계(Normal Relation)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그러나 당장 매우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엄청난 혼란 없이 연착륙이 가능하며 북한 스스로도 그것을 원한다. 우호적인 관계로 갈 수 있는 전환점일 수 있다.”

그로하 소장은 유럽 기업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북한통이다. 2002년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과
함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중앙포토]

 - 그동안 만난 북한 정부 지도자들은 어땠나. 시장과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사람들인가.

 “물론이다. 그들은 레벨이 매우 높은 지식인이다. 기술자든 경제학자든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빨랐다. 다만 오래된 도구(Tool)를 사용할 뿐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본주의를 활용하기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식은 충분하다. 알고 있다면 기회가 올 때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다만 북한은 철저한 미개발국이고 시장경제 경험이 없어 자본주의가 도입되려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 북한 사람들이 당신에게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해 자주 물었나.

 “유럽상공회의소에서 세미나를 주최하면 북한 지식인들이 모여 많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몇몇 사람들은 외부 정보에 대해 굉장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한국 드라마도 본다. 나라 밖의 콘텐트를 접하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 평양의 부유층들은 샤넬 핸드백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북한에도 물론 부유층(럭셔리 피플)이 있다. 아무도 그런 이익을 보지 않는다면 체제 유지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일반 대중과는 매우 분리된 삶을 살아간다.”

 - 유럽 기업들이 북한에 더 진출할 가능성은.

 “2000년 북한이 개방되면서 개성에 붐이 일었지만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지금은 유럽 기업 활동이 몇 년째 멈춰 있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신뢰가 부족하다. 지금 같아서는 그야말로 ‘도박’이니 투자를 강요할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지켜봐라. 북한의 풍부한 인력과 자원에 모두들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북한 정부도 현재의 낙후된 산업을 업그레이드하길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 북한 지도층도 변화를 원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변화를 원한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다만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First Mover)이 아닐 뿐이다. 또한 그들은 ‘세뇌(Brainwashed)’되지 않았다.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 수 있다. ”

 -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김정일 위원장의 만남은 어떻게 성사됐나.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남북한 국제 관계가 지금과 달랐다. 김대중(DJ) 정부 때였고 정부 정책 역시 달랐다. 산업적인 얘기도 많이 진행이 되던 때였다. 그들의 만남은 매우 긴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본격적으로 준비한 기간은 6개월 정도였다. 놀랄 만큼 편하고 화기애애했다. (김정일 위원장은)카다피나 후세인을 떠올리게 하는 광기 어린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속내는 모르지만 매우 친절하고 유머러스했다. ”

글=심서현 기자·JTBC 정제윤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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