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LB] 명예의 전당(10) - 미키 카크린

중앙일보

입력

야구에서 그 중요성에 비해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바로 포수들이다. 일반적으로 팬들을 가장 열광하게 하는 선수는 강타자이고, 포수가 좋은 타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세밀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뛰어난 주루 플레이도 보통은 포수들의 몫이 아니다. 또한 포수의 수비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팬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수비가 가장 나오기 힘든 포지션이 바로 포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수에 대한 고정 관념은 반드시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선수가 미키 카크린이다. 그는 은퇴한 포수 중 가장 높은 .320의 통산 타율과 .419의 출루율을 기록하였으며, 발이 느린 선수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64개의 3루타를 치기도 했다. 또한 삼진을 매우 적게 당하는 타자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수비력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6회나 리그 최다 풋아웃을 기록하였으며, 후대의 자니 벤치와 마찬가지로 한 손으로 공을 받는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리더십과 승부욕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요소였다. 그는 지미 팍스·앨 시먼스·레프티 그로브,·조지 언쇼 등의 대스타들이 속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도 항상 리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 팀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최강으로 군림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감독으로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인해 그는 포수로서는 드물게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수많은 그의 팬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그의 애칭을 따서 '미키'라는 이름을 붙였다. 1931년 10월 20일에 오클라호마 주에서 아들을 얻은 머트 맨틀도 그 중 하나였다.

카크린은 젊은 시절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보스턴 대학 시절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와 육상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미식 축구 팀에서는 선수로서 여러 포지션을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코칭 스태프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방학에는 세미 프로 야구 팀에서 가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 팀에서 활동하는 선수는 대학에서 제적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1923년에 카크린은 도버 시의 마이너 리그 팀에 입단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포틀랜드로 옮겼다. 그리고 1925년에는 애슬레틱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그는 빅 리그 첫 시즌에 신인 포수의 성적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331의 타율을 기록하였으며, 한 경기에서 3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약간 부진했으나, 1927년에는 .338을 기록하는 동시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홈런을 날렸다.

1928년, 카크린은 처음으로 AL MVP에 등극하였다. 그의 타격 성적은 .293의 타율과 10홈런, 57타점으로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기자들은 애슬레틱스가 시즌 막판까지 무적함대 뉴욕 양키스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이 카크린의 '팀을 생각하는' 플레이와 강력한 리더십으로 인해 가능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29년에 카크린은 .331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애슬레틱스는 양키스를 누르고 리그 정상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시카고 커브스와 대결한 이 해 월드 시리즈에서, 카크린은 '더 폴 클래식'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애슬레틱스는 2승 1패를 기록한 상태에서 4차전에 임했고, 이 경기가 7회에 접어들었을 때 0-8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7회에 애슬레틱스의 막강 타선이 폭발하면서 스코어는 7-8으로까지 좁혀졌고, 인사이드파크 홈런 뒤에 주자가 없는 상태에서 카크린이 볼넷을 골라 나갔다. 이후 연속 2안타가 터지면서 카크린이 득점하여, 점수는 8-8이 되었다. 결국 이 이닝에 애슬레틱스는 2점을 더 뽑아 10-8을 만들었고, 이 스코어로 경기를 마감했다.

이 시리즈에서 카크린은 6안타를 날리는 맹활약을 하였고, 애슬레틱스는 16년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하였다.

카크린의 기량은 1930년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해에 타율 부문에서 시즌 중반 한때 4항을 넘겨 선두에 오르기도 했으며, 결국 .357(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이 해에 팀은 다시 팀을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그리고 시리즈에서는 카크린의 장타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1차전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벌리 그라임스를 상대로 홈런을 날린 데에 이어 2차전에서도 플린트 렘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겼다. 결국 애슬레틱스는 4승 2패로 우승, 시리즈 2연패(連覇)의 영광을 안았다.

카크린은 이듬해에도 리그 타격 4위(.349)와 홈런 7위(17개)에 오르는 등 대활약을 펼쳤고, 팀은 AL을 3년 연속으로 제패하였다. 그러나 카크린은 월드 시리즈에서 그답지 않게 24타수 4안타에 그쳤고, 결국 애슬레틱스는 카디널스를 또다시 누르지는 못했다.

1932년 카크린은 자신의 한 시즌 최고 성적인 23홈런과 118타점을 기록하였고, 이듬해에도 그의 기량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겸 감독이었던 카니 맥은 대공황 때문에 점점 팀 재정이 어려워지자 스타 플레이어들을 내보내기로 결정하였고, 카크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타이거스가 투수 1명과 10만 달러를 주고 카크린을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카크린은 타이거스에서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으로도 활약하게 되었다. 타이거스는 1933 시즌 막판에 버키 해리스 감독을 해임하고 델 베이커에게 임시로 지휘봉을 맡긴 상태였다.

카크린은 새 팀에서 맞은 첫 해인 1934년, 선수로서 .320의 타율을 기록하는 동시에 뛰어난 수비력으로 팀의 안방을 지켰고 감독으로서는 101승을 올려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타이거스는 전년도에 5위에 그친 팀이었다.) 그리고 그의 공로를 인정한 기자단은 그에게 다시 MVP의 영예를 선사하였다.

이듬해인 1935년에 플레잉 매니저 카크린은 .319의 타율을 기록하여 리그 9위에 올랐고, 타이거스는 다시 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시카고 커브스와 대결한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 동점인 9회 말에 카크린은 투수 래리 프렌치를 상대로 안타를 뽑았고, 결국 홈을 밟아 시리즈를 끝냈다. 그는 타이거스의 첫 우승을 확정짓는 동시에, 이 팀의 첫 우승 감독이 되었다. 그는 이 날을 "야구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날"로 칭했다.

이듬해인 1936년 카크린은 단장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시즌 중 신경 쇠약 증세로 44경기에 출장하는 데에 그쳤고, 팀은 리그 3연속 우승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7년 5월, 그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카크린이 양키스의 투수 범프 해들리에게서 홈런을 뽑아낸 뒤, 카크린의 타석이 다시 돌아오자 해들리는 빈볼을 날렸다. 그리고 이 볼은 카크린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명중하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의식을 잃었고, 10일 동안이나 혼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당시에는 헬멧이 없었다.)

결국 카크린은 이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시즌 중 감독 자리를 베이커에게 다시 넘겨 주고 물러났다. 이후 그는 애슬레틱스에서 코치와 단장 자리를 거쳤으며 양키스와 타이거스에서는 스카우트로 활약했다. 또한 사망하기 1년 전인 1961년에는 타이거스의 부사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1947년 그는 처음으로전미 야구 기자 협회(The Baseball Writers Association df America)를 통해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포수가 되었다.

고든 스탠리 카크린 (Gordon Stanley "Mickey" Cochrane)

- 1903년 4월 6일 매사추세츠 주 브리지워터에서 출생
- 1962년 6월 28일 일리노이 주 레이크 포리스트에서 사망
- 우투좌타
- 통산 성적 : 타율 .320, 1652안타, 119홈런, 832타점
- 1925년 ~ 1933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포수
- 1934년 ~ 1937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포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