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허수경이 쓴 소설, 희망을 위해 처연하게 절망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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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허수경

허수경(47) 시인이 장편소설을 냈다. 『박하』다. 마침 시인에겐 ‘박하의 나날’이란 시가 있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주점에서 벌겋게 취한 태양은 우는데….’ 시인은 ‘박하’를 어떤 슬픔의 냄새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그랬다. “문학의 일이란 어떤 절망의 현장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그는 절절한 절망의 언어로 시적 울림을 길어내곤 했다.

 소설이라고 다를까. 퍽 시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에게,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이를테면 『박하』는 ‘나에게’로 시작해 ‘너에게’로 문을 닫는 소설이다. 13일 오전 서울 상수동 한 카페에서 시인과 마주 앉았다.

 #나에게

 소설의 줄기는 시인의 개인사와 맞닿아 있다. 시인은 19년 전 고고학을 공부하러 독일로 떠났다. 모국 밖을 떠돌며 고고학과 문학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소설에 그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다. 출판 편집자 이연과 19세기 말 독일로 입양된 고고학자 이무의 이야기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연은 선배 마준이 있는 독일로 건너간다. 이연은 마준이 건넨 이무의 노트를 읽으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상처의 소통을 경험한다. 이무가 전설의 고대 도시 하남을 찾아가는 과정과 이연이 절망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펼쳐진다.

 -개인적 경험과 겹치는 것 같다.

 “6년 전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에서 발굴 작업을 하면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 주인공 이무 역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동료 고고학자의 사연을 토대로 구상한 인물이다.”

 -시로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소설의 언어는 시에 비해 저인망이다. 소설을 통해 말의 감각을 잃지 않는 건 내게 목숨과도 같은 일이다.”

 #너에게

 소설 속 인물들은 온갖 상처로 얼룩져 있다. 작가는 “상처와 상처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때마다 인물들은 어떤 운명적인 멜랑콜리를 경험한다. 상처가 상처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필연적인 연민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연민에 역사에 다름 아니”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상처와 상처가 소통한다면 마침내 희망에 다다를 것인가. 아니다. 소설 속 인물의 사랑은 어긋나고, 삶에 대한 불안감도 “약간, 아주 약간”만 사라졌을 뿐이다. 『박하』는 약간의 희망을 말하기 위해 처연하게 절망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약간의 희망을 “꼭 손을 잡아야만 하는” 당신에게 증언하는 소설, 어쩌면 시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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