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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민중혁명 드라마 사실적 재현"

중앙일보

입력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솔직히 당혹스럽다. 그에게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적잖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니 어쩌니 관념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더 지겨운 일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다.

그래서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텔레비전의 왕조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드라마를 들여다 보는 게 훨씬 편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로는 좀 모자라다. 왕조 중심으로만 펼쳐지는 역사 드라마는 흥미롭게 시청한 뒤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게 전부는 아닐텐데'하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 이덕일 님과의 만남에는 기대감이 있다. 역사 이야기를 소설처럼 편안하게, 혹은 드라마틱하게 들려주는 그의 책들은 이미 인문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

뒤주에 갇혀 죽었다고 알려진 사도세자에 얽힌 비밀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풀어낸 〈사도세자의 고백〉(푸른역사 펴냄)을 써냈던 재야 사학자 이덕일 님이 이번에는 아예 역사소설이라는 푯말을 단 세권의 장편 소설 〈운부〉(중앙M&B 펴냄)로 독자 앞에 나섰다.

- 소설의 머리말에서 이 소설의 소재인 운부 사건을 접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할 만큼 소설로 써보고 싶은 느낌을 가졌다고 하셨더군요.

"조선왕조 개창은 신흥사대부들이 권문세족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요. 그러나 당쟁을 거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이미 국가로서의 순기능을 모두 상실한 상태가 됩니다. 백성들로부터 전혀 지지받지 못하게 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 후 3백년 동안 이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중에 당시 지식인 집단인 승려들이 장길산 무리와 결합해서 조선왕조를 뒤엎으려는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됐어요. 이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도모한 민중 중심의 혁명이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 소설에서 민중에 의해 역사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하셨지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민중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누가 어느 정도로 민중을 위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 소설에서 저는 승려 조직의 총 우두머리인 운부대사가 바로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세상을 끝장내고 농민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차원에서 혁명을 조직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과연 역사 속에 민중이 주인인 적이 있었던가요?
"어차피 정치와 사회는 우리가 아무리 부인한다 하더라도 소수 엘리트들이 이끌어갑니다. 민중이 주인이라는 무책임한 생각보다는 실제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소수 엘리트들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하는 자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 운부 사건과 관련해 민중과 지식인의 역할, 혹은 민중사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청준 님의 중편 〈조율사〉(열림원 펴냄)에는 지식인이 진리의 방향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권력자의 반대되는 방향으로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같은 사관은 어쩌면 지식인 없이는 한 사회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지식인 위주의 사관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운부와 장길산 이야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인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러시아 혁명 이후 막심 고리키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그는 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수용소에 관한 르뽀에서도 수용소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지요. 지식인의 본래 사명을 저버린 그런 행위들이 결국은 소련 붕괴의 원인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운부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의 사명에 철저한 인물입니다. 장길산과의 합류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거죠."

- 굳이 이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설이란 장르를 선택하신 이유는 어떤가요? 또 요즘처럼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한 권으로도 쓸 수 있는 사건을 세 권씩이나 되는 소설로 늘려놓은 까닭은 뭡니까?

"한 권으로 쓸 걸 세 권으로 늘린 것이 아니라 다섯 권으로 쓸 것을 세 권으로 줄인 거예요. 역사서가 됐든 소설이 됐든 주제에 따라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전달 수단을 선택해야겠지요. 운부 사건은 파란만장한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에 역사서로 사건의 앙상한 뼈대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인물들이 펼치는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풍요롭게 보여주어야 했어요. 혁명의 과정은 역사서로만 보여주는 데 부족한 게 많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론서보다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어요."

- 소설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소설은 이론서에서 얻을 수 없는 지식이라든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도높은 경험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풀어나가는 것이어야 하겠죠. 저는 소설의 첫째 요소를 재미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이런 인생을 택함으로써 저런 결과가 나왔구나, 오늘날의 나라면 어떤 길을 걸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죠. 배경이 되는 사회 상황이나 많은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야 '진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소설에서 운부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변혁을 필요로 하는 시대상황과 그들의 철학을 보여주고자 애썼습니다."

- 소설 〈운부〉는 요즘 소설의 경향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겠습니까?
"신세대든 구세대든 사람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사가 중심인 소설이 안 읽히는 것은 '서사'를 흥미롭게 전달하지 못하는 소설가들의 책임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 소설 문장 수업을 따로 받으신 것처럼 문장 기법이 세련된 것으로 읽힙니다. '계명워리' '곁시' '가잠나룻' 등의 순 우리말과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입말 표현을 자주 사용하면서도 문장 전체의 호흡이 끊기지 않고 잘 읽히더군요.
"따로 문장 수업을 받은 일은 없어요. 좋은 소설을 많이 보는 게 가장 훌륭한 문장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삼중당 문고'를 거의 다 읽을 정도로 탐욕적이었지요. 그게 아마 지금 문장 실력의 바탕일 겁니다. 요즘은 옛 말을 잘 구사하는 김주영 님의 작품을 보면서 국어 사전, 중세어 사전들을 찾아보고 익히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 이 소설의 소재인 운부 사건의 핵심 사상을 알고 싶습니다.
"민중혁명이라는 사건의 핵심 사상은 미륵사상입니다. 미륵은 메시아입니다. 우리 메시아 사상의 전통은 정감록에 뿌리가 닿지요. 행복한 낙원이 온다는 생각인 거죠. 이 소설에는 정씨진인이라는 실존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정몽주의 13대 손이에요. 정몽주는 조선 개창에 반대하다 이방원에 의해 죽잖아요. 그런데 그의 13대 손이 새 나라의 임금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정씨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미보다 일반 백성이 받아들이는 강도가 높을 겁니다."

- 사료를 많이 참고해 사건의 원형질에 가깝게 재현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일테면 사건을 온전히 재현하는 게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당시 시대상을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서 애썼어요. 대동여지도와 같은 당시 지도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건 소설 속 실존 인물들이 처했던 상황을 보다 사실에 가깝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추구했던 세상의 모습, 또 민중의 희구한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는 장치에 불과한 거였죠.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의미와 시대적 의의를 재현해내는 거죠."

- 소설의 주인공인 운부 대사에 관한 자료는 많은가요?
"운부에 관한 기록은 실록에는 짧게 나오지만 당시 의금부의 수사기록에 적지 않게 나옵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운부 사건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인데 이를 수사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했던 수사 기록이 있어요. 그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소설 속의 실존 인물들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어요."

- 작가로서 작중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꼽으실 수 있을까요?
"풍수사인 이영창이 매력적입니다. 그는 무술을 할 줄 모른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습니다. 매맞는 고문을 받으며 죽게 되는 순간까지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신념에 목숨을 거는 거는 그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죠."

- 최인호 님의 〈길 없는 길〉(샘터 펴냄)이라는 장편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구성이나 스토리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경허선사에서부터 만공스님까지 이어지는 한국 선불교의 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많이 읽힙니다. 〈운부〉도 소설적 의미보다는 운부 사건을 알리기 위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도가 큽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는 보는 사람을 화나게 만듭니다. 노론 일당독재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조선의 말기 상황에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안타까운 일이죠. 그 상황에 운부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민중의 삶, 즉 국가 저변의 흐름을 가로막는 정치권을 제거하고 새로운 나라를 성립하면 조선 왕조는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 생각을 더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던 겁니다."

- 글을 많이 쓰시는 편이죠? 본격적인 집필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책 읽고 글 쓰는 게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죠. 97년에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 펴냄)를 처음 썼어요. 그때부터는 꾸준하게 1년에 3권 정도의 책을 냈어요. 1년에 약 4천장 정도의 원고를 써낸 셈이죠. 대부분의 책들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씀처럼 기존의 자료를 제 역사관에 의해 재구성한 것인데, 이번에 소설 〈운부〉는 소설적 구성을 위해 약간의 창작을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 이 소설을 쓰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제가 그 동안 쓴 책 중에는 가장 길었지요. 약 3년 정도 걸렸어요."

역사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사마천의 〈사기〉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물론 둘 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 도서일게다.

그러나 둘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읽어야 할 일반 독자라면 자기 성향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짧은 독서로 역사라는 개념의 정의를 읽어내기 위한 독자라면 〈역사란 무엇인가〉쪽이 끌리겠지만, 역사라는 추상적 개념을 정의하지는 못한다 해도 역사 속의 숱하게 많은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를 재미있게 읽기 원하는 독자라면 단연 〈사기〉그 중에서도 〈열전〉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재미 없는 글은 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겠다는 자존심 센 독자가 조선 왕조의 답답한 역사를 읽어야 한다면? 역사적 고증을 무시한 텔레비전 드라마 〈허준〉에도, 민중의 삶을 무시하고 왕조 중심의 이야기에만 집착한 〈왕과 비〉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3년만에 탈고한 이덕일 님의 조선왕조 역사소설 〈운부〉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지음, 푸른역사 펴냄)
운부(이덕일 지음, 중앙M&B 펴냄)
길 없는 길(최인호 지음, 샘터 펴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지음, 석필 펴냄)
역사란 무엇인가(E. H. 카아 지음)
사기(사마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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