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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스포츠 프리즘 ④ 무조건 월드컵 가야 …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기는 감독 뽑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비펠슈테트는 독일의 작은 도시다. 브레멘에서 올덴부르크를 거쳐 빌헬름샤벤에 이르는 29번 도로를 자동차로 한 시간은 달려야 도착한다. 거기 축구장 두 면이 딸린 스포츠 호텔이 있다. 한겨울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인다. 1993년 2월. 내가 도착했을 때 눈을 밀어낸 축구장의 푸른 잔디가 오후 햇살에 반짝거렸다. 조광래는 땀투성이 얼굴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는 프로축구 대우(현재 부산 아이파크)의 코치였다.

 그는 정열적인 사나이다. 뤼베크·올덴부르크·보훔 같은 독일 팀과 경기할 때 골을 내주기라도 하면 피를 토할 듯 고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진주 억양이 강해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지닌 정열의 데시벨은 충분히 느꼈다. 그는 트레이닝 일지를 영어로 썼다. 내가 흘끗 들여다보면 “뭐 하노?”라며 공책을 접었다.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코치는 경기장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아니, 증명해야 한다. 나는 조광래가 대표팀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믿는다. 결과가 나빴던 점은 안타깝다. 일본에 0-3으로, 여러 수 아래로 평가되는 레바논에 1-2로 지면서 조광래는 벼랑 끝에 몰렸다. 절차를 생략한 축구협회의 결정은 유감이다. 하지만 해임하라는 축구 팬의 여론도 없지는 않았다.

 그가 지난 9일 서울 시내의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폭탄선언을 하나 싶어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축구 팬들을 실망시켜 죄송하다”고만 했다. “대표팀이 완성 단계였기에 아쉬움이 크다”는 대목에서 서글픔을 느꼈다. 조광래답지 않은 말이다. 그는 ‘우는 소리’를 못 참는다. 분명한 점은 조광래가 경기를 통해 자신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증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표팀 사령탑이 비었다. 월드컵 지역예선은 쿠웨이트와의 경기(2012년 2월 29일)만 남았다. 지면 최종예선에 못 나갈 수도 있다. 패장은 한국축구 몰락의 주범으로 몰릴 것이다. 언제 칼날이 떨어져 내릴지 모를 단두대. 여기에 머리를 집어넣을 코치는 없다. 있다면 한국 축구를 진정 사랑하거나, 별 볼일 없는 인물이리라. 특히 후자를 경계한다. 도박을 하듯 태극마크를 줄 수는 없다.

 조광래를 경질한 과정은 잘못됐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 만회하는 길은 한 가지다. 적절한 인물을 절차에 맞게 기용하라. 무조건 월드컵에 가야 한다. 외국인 감독이냐 국내 감독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꿩 잡는 게 매고, 희든 검든 쥐를 잘 잡으면 훌륭한 고양이다.

허진석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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