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페셜 리포트] 70년대‘대표 채권’ 4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대표적 장수기업인 삼양사는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68년 정부를 상대로 대담한 소송을 벌였다. 군이 징발한 서울 독산동과 경기도 의정부 가릉동 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법원은 “국가가 공공의 필요에 의해 재산권을 제한할 때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보상금은 1억2065만원, 지금 가치로 따지면 수백억원이다. 삼양사가 승소하자 군이 한국전쟁 전후로 징발한 토지에 대한 보상 소송이 봇물 터지듯 몰려들었다. 예산이 빠듯했던 정부는 난감했다. 3억4000만㎡에 육박하는 징발 토지에 대한 보상금은 267억원에 달했다. 국방부는 보상 예산으로 한 해 1억원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당시 경제기획원 쪽에서 짜낸 묘안이 징발보상증권이다. 1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조건이었다. 보상 요구는 수용하되 시간은 벌 수 있게 된 셈이다.

최초의 토지 보상용 채권이자 높아진 권리의식의 상징인 징발보상증권(사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70년 첫 발행 이후 41년 만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징발보상증권규칙 폐지령’을 입법예고했다. 이미 발행이 중단된 상태지만 내년 초 관련 규칙이 폐기되면 이 증권은 법률상으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퇴장은 쓸쓸하다. 시효가 지난 증권이라 실물을 찾기도 어렵다. 재정부 국채과 관계자조차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아는 공무원도, 기록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초라한 최후를 맞았지만 징발보상증권은 70년대 초반 정부 발행 채권(국채)의 왕이었다. 첫 발행을 한 70년 국채 총발행액의 53%(49억7600만원)가 징발보상증권이었다. 이듬해에는 국채 발행액의 87%를 차지했다. 77년까지 총 392여 억원이 발행됐다. 이후 각종 개발사업용 국채가 쏟아지면서 비중이 축소됐다. 정부는 80년대 후반까지 원리금 상환을 지속했다.

 토지 수용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했지만, 이 증권의 보상 조건은 그리 후하지 않았다. 시가가 아닌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을 근거로 보상액을 정했기 때문이다. 과표가 시가의 10% 수준인 땅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10년 장기 상환은 둘째 치더라도 연 5%의 수익률은 당시 적금 이자(연 25%)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이 때문에 증권의 발행이 역설적으로 집단소송을 불렀다. 법원 판결이 명확히 정리된 75년까지 법정에 쌓인 소송은 415건에 달했다. 요즘 택지개발지구에 보상금을 노린 브로커가 몰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브로커가 활개를 쳤다.

 법원 판결은 엎치락뒤치락했다. 처음에는 원소유자 편을 들었지만, 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과세표준에 따라 증권으로만 보상한다’는 쪽으로 정리됐다. 토지보상 전문 안재형 변호사(법무법인 율현)는 “현재는 정부의 각종 토지 보상이 시가 보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그러나 법률상 시가 개념은 개발이익을 배제하기 때문에 소유주가 체감하는 시가와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