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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겠다"

중앙일보

입력

"'독자님들, 우리 소설 좀 읽어주세요' 라고 신문에 광고까지 내려 했어요. " 1970, 80년대 독서시장을 석권하며 몇몇 소설가들과 함께 본격소설의 인기.대중화 시대를 열어나갔던 박범신(朴範信.54)씨는 사재를 털어 '소설 읽기 광고' 까지 내려 했다. 작가들이 직접 독자를 찾아나서 호소해야 될 정도로 본격문예물 시장이 죽어 있다는 것이다.

박씨가 지난 시대 자신의 인기작들을 다시 펴내기로 하고 첫번째로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1, 2권과 중.단편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등 3권을 최근 세계사에서 펴냈다.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씨는 '풀잎처럼 눕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킬리만자로의 눈꽃' '흰소가 끄는 수레' 등 주로 장편을 위주로 40여권의 작품을 펴냈다.
이 중 우리 시대에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추려 '박범신 문학' 이란 타이틀로 20권 정도를 묶어 순차적으로 펴내겠다는 것.

"욕망의 사회학과 욕망의 심리학을 동시에 아우르는 유니크한 주제의식, 화려한 문체와 극적인 서사로 무장한 박범신 문학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한국 장편소설의 재충전과 활력을 도모하기 위한 시금석 역할을 할 것" 이라는 게 '박범신 문학' 기획위원들의 말이다.

오늘에도 유효한 그의 특장을 잘 드러낸 작품이 출세작인 '죽음보다 깊은 잠' . 스승인 정교수와 술집 악사인 영훈, 사업가 경민, 대학 동기인 현우와 차례로 깊은 관계를 갖고 또 떠나야 하는 다희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도시인의 수직 상승 욕망과 그 끝에 남은 인간의 순수혼으로 50만 독자를 사로잡았던 작품이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아 안고 고개를 묻었다.
조리된 생선에서 맡게 되는 그런 냄새가 났다.
아아, 이제 그에게서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 (중략)바닷소리가 나의 '이름' 을 부르는 거야. 다희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요술처럼 바닷소리를 만들어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라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으니까. "

이제 서로 떠나야 할 때를 예감하며 다희와 정교수가 만나는 대목이다. 젊은 여성이 뭇 남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흥미로운 구조, 소위 '통속 장치' 속에 욕망의 사회.심리 지도를 펼친다. 그러나 박범신 문학의 매력은 무엇보다 욕망에 들끓어 조리된 생선냄새와 같은 오늘과,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신선한 순수혼의 과거가 한순간에 중첩되는 데 있다. 그 중첩은 현재의 욕망과 흥미에만 빠지지 않고 지금도 살아 숨쉬는 독자 내면의 순수를 둘러보게 한다. 실제 박씨의 홈페이지(http://wacho.sarang.net)에 들어가보면 "세상과 저 사이에 있는 틈, 그 틈을 통해 사람들이 잊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 는 독자의 편지도 올라와 있다.

'내면을 둘러볼 여유없이 단숨에 읽혀야만 살아남을수 있는 요즘 '독서시장에서 박씨의 예전 인기 소설들이 어떻게 읽히고, 또 영혼을 감각화하는 그의 기법과 문체가 젊은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그렇게 광고까지 내고 싶을 정도로 소설이 안 읽히고 있는 데는 작가들의 책임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박씨는 "물론 그렇다" 고 했다. 그러나 "기발한, 극한적 상상력에 의한 독자 흡인은 젊은 작가들에게 맡기고 비록 소수의 독자를 끌지라도 삶과 사회의 실체를 돌아보는 소설 본래의 영역에 충실하겠다"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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