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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번째 편지 〈나는 기다리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며칠 동안 내리지 않는 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나는 몰래 밖으로 나가 슬그머니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맨발에 운동화 차림이어도 당장 목적지가 없어도 좋습니다. 가다 보면 저녁쯤엔 필시 어딘가에 닿겠지. 비가 내리는 날엔 바다든 산이든 어느 낯선 소읍이든 한가지 톤으로 제 무게를 빼고 떠 있습니다. 모든 풍경들이 감광지를 통해 내다보는 세상처럼 아득한 거리를 두고 자전(自轉)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 날은 허름한 시골 식당에 앉아 김치전에 흰 막걸리를 마시고 싶습니다. 혼자여도 그만입니다.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처럼 나 또한 스스로 가라앉아가면 그뿐입니다.

비내리는 날. 떠날 수 없다면 누군가를 불러내 포장마차에 앉아 꼼장어구이에 소주를 마시는 것도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포장마차는 누군가 둘이면 좋겠고 말없는 목이 긴 여인이면 더욱 좋습니다. 딱딱하고 좁다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지붕에 후득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고즈넉이 취해가는 일은 감미로운 일입니다. 옆에는 누군가 분명 앉아 있고 말이 끊어지는 순간이 자주 와도 별로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상대의 옆모습을 바라보거나 엿보는 일 또한 감미롭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스무 살 때부터 줄곧 말입니다.

나는 또 못 가본 곳이 아직 너무도 많습니다. 남극, 북극이 그렇고 페루나 칠레도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아프리카와 그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방송국에 다니는 친구가 포장마차에 앉아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직 티벳도 안 가보고 뭐했어요? 그 찬란한 보라빛의 땅 말예요."

그 단도직입적인 말투에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 네, 나는 아직 티벳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므로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자주 목격합니다. 그 은빛 날개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설렙니다.

여인과 여행을 택하라면 나는 아무래도 여행 쪽을 택하겠습니다. 둘이 함께 갈 수 있다면 당연 둘 다를 택하겠지만 말입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오래 떠나지 못하고 있으면 늦은 밤 여행 책자를 뒤적여 봅니다. 마음이 달콤쌉쌀해집니다. 혼자 이렇게 중얼거려보기도 합니다.

"곧 가방을 꾸릴 날이 오겠지. 다시 미지로 향하는 그날이. 그리고 아무에게나 더듬거리며 길을 묻고 낯선 곳에서 불안한 잠을 자고 날이 저물어가는 기차역에 앉아 배고픔을 달래며 구겨진 지도를 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야겠지."

이렇듯 나는 미지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삽니다.

무더위의 밤이 다시 내립니다. 오늘도 새벽에 잠이 들겠지. 여름날엔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 해가 뜹니다. 5시가 전후가 되어 문득 창문을 돌아보면 새벽의 그 놀라운 빛이 밖에 가득합니다.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마음을 가득 채워버리는 그 빛!

티벳이 보랏빛이라고 했던가. 보랏빛으로 시작되는 여명은 시시각각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며 감청으로 변하다가 감람으로 바뀌고 그러다 보랏빛이 뒷전으로 사라지며 마침내 바다 속 같은 텅 빈 푸르름만이 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머무는 순간도 거의 찰나에 불과합니다. 혹시 커피라도 끊여 가지고 돌아오면 어느 새 날이 훤하게 밝아 있습니다.

가끔 책상에 앉아 있다 밤을 새울 때가 있습니다. 새벽의 그 다채로운 순결의 빛을 목도하기 위하여. 티벳이 정녕 그런 곳인가. 남극 북극이 또한 그러한 곳인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줄기. 그가 구비구비 힘들여 당도한 곳이 고래가 사는 바다였듯이 그렇게 또 나는 길을 더듬어 가야 하겠다.

삶의 한가운데, 감동이 유독 잦은 때가 있었습니다. 때없이 목이 매이던 순간들 말입니다. 그 모든 소리들, 그 모든 풍경들, 그 모든 사람들이 저를 목매이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전후해서 그후 몇 년 간. 누구나 가슴 벅차고 그만큼 괴로웠을 생의 한가운데.

그때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뜸하게 찾아옵니다. 생의 모든 순간은 단 한번 왔다가는 것. 헤어진 지 몇 년만에 누군가를 만나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똑같은 홍차나 커피를 마셔본들 느낌은 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존재와 서로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기다립니다. 그렇게도 마음 졸이며 괴로워하고 긴 기다림 뒤에 가슴이 절대 환희에 타오르던 순간들을 말입니다. 그것이 미혹이었고 다만 젊음이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시 장마철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밤새 서 있고 싶습니다. 새벽 2시인가 3시에 불현듯 깨어나 배꽃이 보고 싶어 십 리가 넘는 배밭을 달빛을 따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다시 그래볼 수만 있다면 ......

하학길 버스 정류장에 서서 그 여학교 3학년 2반 25번 학생을 다시 기다려볼 수 있다면......무작정 바다가 있는 쪽을 향해 가출을 할 수만 있다면......돌아와 매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그 시절 나는 어두운 방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었지.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입니다. 그 울울했던 시절로 단 한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봄에 흰 옷을 입고 풀밭을 가로질러오는 손님처럼 다시 그런 순간들이 찾아와 주길 기다리며 나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데, 어느덧 서른살의 때가 다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나이를 아주 좋아하며 사는 스타일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 서글픈 것은 한번 다녀간 생의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시간보다 조금 앞서 떠나야 할 모양입니다. 돌아보지 않기 위하여. 시간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조금 먼저 나를 끌고 무언가를 찾으러 제발로 앞서 가야 하는 때가 온 모양입니다.

약속하지 않고 와도 좋습니다. 어디로 가든 나는 당신과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 야릇하고도 미묘한 시간의 기울기 속에서.

이제 새벽의 놀라운 빛을 마중할 차비를 해야겠습니다. 아, 여태도 설명할 길 없는 그 푸르른 시간의 마술 같은 한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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