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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진료는 의사에게, 건축계획은 건축사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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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필자의 아버지께서 쯔쯔가무시 병에 걸린 줄도 모르시고 열흘 정도 집에서 앓으시다, 늦게 병원에 입원해 고생을 하셨다. 얼마 되지 않는 농작물을 수확하다 병환에 걸리신 듯하다.

 내년에 구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서는 쯔쯔가무시 상처에 만병통치약인 바셀린을 제대로 발랐다면 입원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계신다. 부친께서는 “당신 말대로 했으면 나는 죽었어…” 하신다. 의사(?)와 환자의 싸움이다.

 필자는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건축설계를 위해 설계사무소를 방문한 건축주가 건축사와 계획에 대해 상의도 하기 전에 이미 모든 설계를 머리 속에 담아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직 진찰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처방전을 만들어 온 것이다. 올 초 조그마한 상가주택을 설계하게 됐다. 건축주는 상담하는 과정에서 이미 메모지에 수치, 평면배치 및 실까지 구성한 화려한 도면을 제시했다. 난감했다. 가족 구성원과 향후 임대여부, 시공성 등을 고려해 평면을 제시하니 본인이 제시한 수치와 평면 구성대로 굳이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 건축사들이 설계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면, 내일 당장 소문이 난다. “○○설계사무소는 요즘 배가 부른가 보다.” 참으로 답답한 경우다. 할 수 없이 건축주의 제시안을 가지고 어느 정도 수정을 해 진행했다. 준공을 하고 3개월 정도 경과 후 사무실을 방문한 건축주는 후회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그게 아니란다.

 “내가 더 세게 말렸어야 했는데…”하는 후회를 해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지난해에는 경치가 좋은 곳에 펜션을 설계하게 됐다. 건축주는 평면에 입면까지 구상을 다 끝내고 왔다. 계획은 이미 완성 했으니 도면만 작성해 허가만 진행해 달라고 했다. 내가 진찰 다했고 치료도 했으니 처방전만 작성해 달라는 식이다.

 입면까지 구상 했다니 건축사 사무실에 오기까지 건물을 얼마나 짓고 부스고 했을까. 그러나 건축주가 제시한 입면은 내부를 전혀 반영 하지 않아 상투 틀고 양복 입은 격이었다. 일주일 동안 설득했다. 다행히 고집을 꺾어 주어 건축사 계획안으로 진행, 준공까지 했다.

 건축사 면허(현재는 자격)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건축과목 전체에 대한 논술을 본다. 10개 과목 정도의 두툼한 대학교재에서 단 3항목을 묻는 논술이다 보니 모든 교재를 외워야 한다. 또 설계는 당일 과제를 주어 4시간 동안 계획에서부터 평면, 입면까지 작성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만물박사가 돼야 갑작스런 설계 과제에도 망신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건물을 한 번 지어보면 10년은 늙는다고 한다. 건축사 또한 계획하고 공사해 준공하기까지 항상 긴장을 하고 지켜보게 된다. 건축사는 계획을 하며 주변의 자연적, 인위적 조건 모두를 반영한다. 주관적 판단보다는 객관적 판단에 기초해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진료는 의사에게, 건축계획은 건축사에게’가 필요한 이유다. 

이문규 ㈜다스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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