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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search & Education) 수업 진행하는 고교 증가세

중앙일보

입력

심민수(오른쪽)씨와 김화경 교수가 함께 연구했던 논문의 핵심이론을 다시 검토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지난 9월 10일, 해외 수학 저널인 『Discrete Mathematics』홈페이지엔 낯설지 않은 한국 이름이 논문의 제 1저자로 등록됐다. Min Soo Sim.(심민수·연세대 글로벌융합공학부1) 어느 한 박사급 연구원의 논문이라면 대단한 일도 아니겠지만, 저자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불과 19살이다. 더군다나 논문의 집필 시기는 고교 1학년 때다. 심씨가 서울과학고 재학시절 R&E(Research&Education, 대학·연구소와 같은 외부기관과 연계해 진행하는 연구프로젝트)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상명대 수학교육과 김화경 교수와 공동연구 한 결과다.

학자 자질 키우고, 내 포트폴리오 만들어

 심씨의 논문 주제는 ‘특정한 조건을 갖는 그래프·행렬의 일반화된 경쟁지표의 상한’이다. 특정 네트워크 내 2개 이상의 정보가 어떻게 상호 간섭·통합하는지의 과정을 수학적 모델로 일반화시킨 연구다. 첫 논문에 이어 심씨의 2번째 논문도 수학 저널에서 등재여부를 심사 중에 있다. 2번째 논문은 고교 2학년 때 집필했다. 심씨는 “혼자 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며 “R&E 프로그램 덕을 톡톡히 봤다”고 말했다.

 과학고에선 R&E 활동이 일반화돼 있다. 1학년 때 연구주제를 정해 2년 동안 멘토교수와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심씨는 매주 수요일 오후 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기본적인 수학이론교육을 받고 연구주제를 더 구체화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심씨와 김 교수는증명과 반박, 재증명의 수학논쟁을 수 십 차례 주고 받았다. 그 지난한 논쟁이 지금의 논문으로 꽃을 피웠다.

 김 교수에게 심씨는 R&E수업으로 만난 첫 고교생 제자다. 김 교수는 “심민수 학생과 만나면서 나도 배운 것이 많다”며 “지금은 어엿한 동료 연구원 같은 느낌”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논문연구가 끝난 뒤에도 심씨는 종종 김 교수를 찾는다. 연구원·학자로서의 자세와 공부방향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서다. 심씨는 “2년 동안 끈질기게 한 주제를 연구하면서 연구원·학자에게 필요한 우직함·끈기, 연구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씨는 이런 진로·적성 계발 활동을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자기소개서에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과학중점학교·자율고로 확대, 진로 계발 기회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고 진로·적성 계발활동이 중요해지면서 영재학교·과학고뿐 아니라 과학중점학교·자율형사립고에서도 R&E수업이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과학창의 재단 김기상 연구원은 “R&E 수업은 논의·토론·실험·분석의 모든 과정을 연구논문에 담아낸다”며 “실험실습·연구능력과 자기주도학습의 경험을 보여주기에 좋은 소재”라고 말했다.

 하나고는 과제연구 수업을 정규 교과 과정으로 포함시켰다. 지난 1년 동안 60 여 팀이 참가해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공학까지 다양한 주제연구를 진행했다. 학교교사가 지도교사를 맡거나, 필요에 따라 연구소·대학과 연계해 실험을 수행했다. 하나고 이효근 과학부장교사는 “선택수업이었음에도 전교생의 1/3이 참여할 정도로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며 “실험·체험형 활동으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했다. 천안북일고 국제과도 DRP(Directed Research Project)라는 연구주제수업을 운영한다. 2·3학년 정규수업에 포함시켜 매주 5시간씩 과제연구를 진행한다. 천안북일고 최진찬 국제과 부장교사는 “3년 동안 한 주제를 깊이 있게 연구해 논문으로 완성한다”며 “향후 유수 저널에 학생들의 논문이 실리도록 지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용인외고는 졸업논문인증제도를 운영 중이다. 매해 졸업생의 2/3 정도가 참가해 연구논문을 제출한다. 내년엔 한국외국어대학 이·공계 학과와 연계해 R&E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서울고·마포고·대진고·분당중앙고·용인수지고와 같은 과학중점학교에서도 R&E 수업이 활발하다. 학교별로 작게는 10여 개 팀에서 60여 개 팀까지 인근 대학·연구소와 연계해 R&E 수업을 진행 중에 있다. 내달 15일에는 전국 100개 과학중점학교가 모여 R&E 발표회를 가질 계획이다.

 학교 간 공동연구라는 새로운 수업모델도 시도됐다. 지난 3월부터 6개월 간 하나고 34명의 학생과 마포고 17명의 학생들이 모여 수원 화성의 축조 기술에 관한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학생들은 국어·한문, 역사·경제, 지리, 수학·물리, 미술건축 5개 영역에 분과별로 참여해 주제연구를 끝마쳤다. 화성 건설과 조선후기 자본주의 실재론, 수원 화성 시설의 미적 완성도 평가 등 석·박사 연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자율고?과학중점학교의 R&E 수업은 시작단계지만 성과는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노로바이러스(NORO·식중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던 하나고의 한 팀은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에 초대받아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고교생으로는 이례적인 발표였다. 이주영(하나고 2)양은 “바이러스·세균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관심 분야와 진로를 확실히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분당중앙고 이계명 수리과학부장교사는 “일반고 학생들도 R&E 수업으로 수준 높은 탐구 능력을 갖추게 됐다”며분위기를 전했다.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사진="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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