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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전해듣고 모금 기념사업에 24만 마르크 지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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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테오 돔이 자신의 지원으로 마련된 서울 창신동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유품을 둘러보다 감회에 젖었다. 조용철 기자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했다. 이 소식은 바다 건너 독일의 시민운동가 테오 돔을 흔들었다. 80년대 돔은 물심양면으로 한국의 인권과 노동운동을 지원했다. 1만 마르크, 7만 마르크 식으로 짬짬이 보내 전태일 기념사업회 토대를 마련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말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일흔넷의 백발 신사가 된 그를 만났다.

칼바람이 불던 24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 사무실이 있는 창신동의 가파른 언덕길 여기저기엔 ‘미싱 시다 구함’이라는 쪽지가 곳곳에 붙어 있다. 이날 테오 돔은 지난 9월 타계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유품을 전시한 방을 오래 서성거리며 사진에 담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더 만났으면 좋았을 걸….” 말끝을 흐렸다.

비정부기구(NGO) 활동가였던 돔은 전태일 사건 후 한국을 파고들었다.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부했다. ‘민중’과 같은 한국어도 배웠다. 특히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10대라는 점에 놀랐다. 그가 활동하던 NGO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는 아동복지에 초점을 맞춘 단체였다. 그에게 전태일 사건은 곧 청소년 노동착취의 문제였다. 그는 코리아(Korea)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독일인들에게 청계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렸다. 그의 강연을 들은 10대 학생들은 ‘전태일의 뜻을 기리자’는 집회를 열었고 모금도 했다. 돔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열심히 물심양면 지원했다. 그러다 당시 안기부의 블랙리스트에도 올랐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청계 피복 노조와 돔을 연결했던 최혁배 변호사는 “돔 선생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전태일기념사업회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는 “든든한 동료이며 항상 뜻을 같이해준 고마운 존재”라고 말했다. 20년 만에 방한한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20년 동안 안 온 이유는.
“마지막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공항에서 갑자기 남자 두 명이 날 가로막았다. 안기부 요원이라고 하더라. 공항 내 어떤 사무실로 끌고 가서는 2시간 넘게 조사했다. 왜 한국에 왔느냐고 했고 민주화 운동가들 이름을 대면서 무슨 관계인지 캐물었다. 제일 집요하게 물었던 건 북한과의 관계였다. 아무 관계 없다 해도 소용 없었다. 독일대사관 관계자가 온 뒤 조사가 끝나 겨우 비행기를 탔다. 그 전에도 청계피복노조 관련자들 만나고 집회나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두 명씩 미행이 붙더라. 마지막 공항 취조 이후론 ‘인간의 대지’ 이사회가 한국 활동을 위험하다며 금지시켰다. 이후 인도 등에서 활동하다 2000년 은퇴했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부모님이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했다. 아시아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자연스레 아시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키웠다. 베를린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프라이부르크대 연구소로 옮겨 저개발국 사회학을 공부했다. 이후 NGO활동을 하고 싶어 ‘인간의 대지’에 합류했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지은 동명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인간의 대지’는 소설 내용처럼 휴머니즘을 표방하며, 특히 아동과 청소년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이후 친구인 귄터 브로이덴베르크 오스나브뤼크대 교수에게서 윤이상·김대중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을 알게 됐다. 이후 전태일 사건을 접하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책자도 만들고 강연도 하면서 전태일에 대한 독일 내 인지도를 높여갔다. 강연을 들은 학생들이 다달이 5~15마르크씩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반응이 뜨거웠다. 또 ‘인간의 대지’ 이사회를 설득해 지원금을 한국에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보낸 총 금액이 24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약 1억4400만원)다.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노동자를 위한 의료 시설도 마련했다.”

-전태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나.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선 노동운동과 직결되지만 나는 청소년 노동 문제에 경종을 울린 인물로 이해한다. 그리고 노동자 문제라 해도 노동자는 곧 부모라는 점에서 결국 노동자 문제는 아동과 청소년의 문제로 연결된다.”

-전태일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기억에 남는다. 참 강인한 여성이었다. 단지 전태일의 어머니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여사가 하는 말엔 특유의 힘이 담겨 있었다고 기억된다. 언어가 달라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소통했다.”

-20년 만의 한국, 참 달라졌겠다.
“내가 왔던 그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도심의 건물숲에서부터 교통시스템까지, 급속한 근대화 속도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호텔 앞에 전경이 서있는 걸 보고 옛날 생각이 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집회 때문에 그랬을 거다. 여당이 기습 처리하면서 야당 의원 한 명이 국회 안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등 대립이 날카롭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국회에서 최루탄? 외국인 입장에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다. 건강한 민주주의에선 반대 목소리를 당연히 낼 수 있다. 하지만 방식에 품위가 있어야 한다. 나도 야당인 녹색당 소속이고 정부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무례나 폭력엔 반대한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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