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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 배추왕 “폭락 다음해엔 폭등하는데 … ”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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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3일 오전 9시 서울 가락시장. 경매가 끝난 시장 한편에 사람 키보다 높은 배추가 쌓여 있었다. 배추 무더기를 지키던 상인은 “시장에 남은 물건이 없어야 할 시간인데 이렇게 팔지 못한 게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20년간 이곳에서 도매점을 운영해 온 정자환(51)씨도 “배추 값이 폭등한 지난해에도 5t 트럭 2대 분량의 배추를 팔았는데 요즘은 1대 반도 안 팔린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락시장에서 1만원을 호가하던 배추 10㎏은 올 들어 4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도 늘게 마련. 그런데도 김장철 대목을 누려야 할 도매시장이 한산한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해 가락시장에서 1만원을 호가하던 배추 10㎏은 올 들어 4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최근 전남 나주시의 한 농가가 배추를 폐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락시장 배추·무 전담 경매법인 대아청과 이정수(55·사진) 대표는 “추위가 늦게 찾아와 김장철인데도 정작 김장을 담그는 가정이 줄면서 시장도 활기를 잃었다”고 말했다. 대아청과는 국내 배추 유통량의 6%가량을 취급하는 최대 경매업체다.

 사실 올해 김장용 배추는 풍년이 들었다. 지난해 배추 파동으로 재배면적이 13% 늘었다. 생산량은 그보다 더 늘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23% 많아졌다. 김장용 배추가 자라는 기간인 8월 말 이후 약 석 달가량 기상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배추 생산량은 평년과 대비해도 7%가량 많다.

 공급이 늘면서 가격은 지난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낙폭이 크자 정부와 농협이 나서 농민에게 지원금을 주고 배추밭을 갈아엎고 있을 정도다. 공급을 줄여 가격이 더 떨어지는 걸 막으려는 것이다. 농민들이 배추를 팔아 생산비라도 건질 수 있게 하려는 취지다. 이 대표는 “지금이 지난해 배추 파동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배추 파동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올여름 한 통에 2만원대에 육박했던 수박을 예로 들었다.

 “지난해 배추 파동 때문에 수박을 심던 농민들까지 밭에 배추를 심었어요. 그래서 수박 값은 오르고 배추 값은 통당 1000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죠. 내년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요.” 배추 판매가 부진하면 농민들이 다른 작물로 쏠려 배추 값은 폭등하고 다른 작물은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와 시장 상인들이 “김장을 담가 달라”고 당부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 대표는 “한 가정에서 3포기만 김치를 더 담가도 10만t 이상은 추가로 소비될 수 있다”며 “이 정도면 연간 배추 생산량의 5%가량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대아청과 김기영(52) 경매사는 “경매 물량이 열흘 전과 비교했을 때 10%가량 줄었다. 물량이 주는데도 가격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떨어졌다”고 했다. 그만큼 팔리지 않고 쌓이는 재고가 늘었다는 뜻이다. 김 경매사는 “쌓이는 배추를 볼 때마다 배추 파동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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