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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병수의 희망이야기

이런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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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손병수 논설위원

“곧 한국으로 돌아가신다지요. 우리가 저녁 한번 대접할게요.” 그와 미국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지난 여름, 뉴저지 북부의 한 한국 수퍼였지요. ‘우리’라는 말이 유별나게 들렸습니다. 쇼핑카트를 잡은 그의 옆에서 한 여인이 내외하듯 몸을 돌렸습니다. 2년 전부터 사귀고 있다는 그녀였지요. 엉겁결에 “그러마” 약속은 했지만 결국 그를 다시 만나진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3년 전 이맘때였네요. 당시 뉴욕에서 일하던 신문사로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저는 단박에 알았습니다.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이후 연락이 끊어졌던 그였습니다. 11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난 그는 허름한 점퍼에 낡은 청바지 차림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아보기 힘들 만큼의 남루함이었습니다.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된 97년 무렵의 그는 당당한 엘리트 직장인이었습니다. 고교입시 마지막 세대로 명문고를 나와 역시 명문대를 거쳐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간부였습니다. 이재에 밝아 서울 시내에만 아파트 5채를 갖고 있었고, 주식에도 거액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약속은 거의 최고급 호텔이나 식당이었고, 강남 룸살롱을 제집 드나들듯 했지요.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아파트도 주식도 폭락하면서 그는 졸지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습니다. 실직은 물론이고, 십수 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두 아들을 노부모에게 맡겨두고 98년 초에 무작정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습니다. 주머니에 200달러 정도 있었지요.” 곧 뉴욕으로 옮겨서 처음 시작한 일이 수퍼에서 물건 박스 뜯고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시간당 4달러짜리 막일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온 숙소에서 부풀어오른 손을 주무르며 눈물 흘렸답니다. 서류작성이나 먹고 마실 때 외에는 써본 적이 없던 손이었으니까요. “그땐 단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였지요.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아 주방 일을 배웠습니다. 식당과 델리를 오가며 돈을 모았지요.”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에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한 그는 곧바로 서울에 남겨둔 두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두 아들을 도시락 싸주고, 빨래 해가며 키웠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란 소리 들어가며 키운 그 아들들이 지금 뉴욕의 번듯한 대학 졸업반이 됐습니다. 불법체류자인 데다 수입도 빠듯한 아버지를 믿고 건강히 자라준 두 아들을 보며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우선 그간 모아둔 돈으로 내년에 가게를 열 생각입니다. 브루클린과 브롱스를 돌며 가게 터를 물색 중입니다. 결혼해서 가정도 새로 꾸릴 참입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전화한 그가 말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야지요. 한국은 그 다음에 가볼 계획이고요.” 태평양을 건너온 그의 목소리가 참 밝고 싱싱했습니다. 그의 희망이 함께 건너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식사 한번 잘 대접할 테니.”

손병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