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시험에 든 박근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23일 대학 강연은 ‘박근혜식 정치의 터닝포인트’로 주목할 만하다. 박 전 대표는 이날 대전대·한남대에서 대학생들과 만나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 자체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첫째, 말이 많아졌다. 단답형, 외마디로 유명한 박 대표는 하루 종일 말을 쏟아냈다. 취재진이 받아쓴 스크립트가 3만 자를 넘었다. 둘째, 말의 내용도 달라졌다. 박 전 대표는 사생활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린다. 이날 대학생들과의 만남에선 온갖 질문에 즉답했다. ‘사랑 경험’부터 ‘다이어트’까지. 특히 박 전 대표는 스스로 2006년 테러 경험을 언급했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테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다. 당연히 박 전 대표 앞에선 누구도 꺼내기 힘든 금기다.

 셋째,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잘 못해 벌을 받고 있다”는 반성이나, 대학 등록금 지원 예산이 “부족하고,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지적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나 마찬가지다. 현 정권과의 차별화는 여당 대권주자의 숙명이다.

 넷째, 얼음공주가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감성적 접근이다. 단상에 올라 준비된 원고를 읽는 대신 스티브 잡스처럼 마루를 오가며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얘기하듯 프레젠테이션 했다. 학생들이 날린 종이비행기에 적힌 질문을 즉석에서 대답했다. 먹던 밥을 옆 학생에게 덜어주고, 옛날 사진을 공개하고, FTA 반대 피켓을 들고 자신의 방문을 가로막는 학생 시위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강행했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박근혜의 변신은 절박했기 때문이다. 도전에 대한 응전이다. 가장 위협적인 도전은 안철수다. 안철수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님이 확인됐다. 지난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표라는 실체로 드러났다. 안철수 지지율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잠시 가라앉았던 지지율은 지난 15일 1500억원 기부를 선언하면서 다시 박근혜 지지율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안철수라는 도전이 내년 대권을 향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안철수의 정치 멘토로 알려진 법륜 스님은 23일 사실상 ‘신당 창당’ 스케줄을 발표했다. 연말까지 깃발을 올리고, 내년 4월 총선에 참여한 다음 안철수를 대권후보로 내세운다는 일정이다. 물론 안철수의 출정선언은 미지수지만, 법륜과 신당세력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법륜은 박근혜에 대한 공격도 병행했다. 강연에서 “여자가 대통령 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법륜은 ‘박근혜 비판’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런 해명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통령이 되려는 여자’는 당연히 박근혜며,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아본 적이 없다’는 지적은 박근혜의 삶을 통째로 비판하는 포인트다. 법륜의 정치자문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도 “박근혜로 대표되는 기존 정치는 안 된다”고 거들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박근혜의 힘을 잠식하고 있다. 박근혜 캠프로 몰리던 발길이 줄어들고, 친박을 자칭하던 정치인들도 한눈팔기를 시작했다. 박근혜의 구심력이 떨어지면서 한나라당의 분열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박근혜를 ‘기득권’이라 비판하면서 출마의 뜻을 감추지 않고 있다. 친이계 일부의 탈당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안철수의 출마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눈앞에 닥친 시험대다. 정치생명을 걸고 변해야 한다. 변신의 첫 무대인 23일 대학 강연은 안철수의 청춘콘서트 같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변하겠다는 의지는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식 소통’ 1차 시도엔 합격점을 줄 수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다음엔 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형식보다 내용의 변화가 더 기대된다. 아무리 감성적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꿈·희망 같은 무결점 용어를 반복하는 교과서식 콘텐트로는 진짜 감동을 줄 수 없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