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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 번호 보이스피싱 뒤엔 070업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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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모(37)씨는 지난 2월 중국 옌지(延吉)에 건너가 전화 개통 등을 하는 소규모 통신업체를 차렸다. 그러고는 현지 동포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사이트에 ‘원하는 번호로 발신 가능, 번호 수시로 변경 가능’이란 내용의 광고를 냈다.

 이씨의 광고를 보고 연락을 해 온 사람들 중에는 중국 내 보이스피싱(전화사기) 조직이 있었다. 이씨는 이 조직에 인터넷 전화를 개통해 주고 ‘발신번호 변조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내 업체를 연결해 줬다. 발신번호 변조 서비스는 가입자가 인터넷 전화 관리 사이트에 접속해 본인이 원하는 전화번호를 입력하면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전화에 그 번호가 뜨도록 하는 서비스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이씨가 가르쳐 준 사이트에 접속해 대검찰청·경찰청·금융감독원 등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국내에 무작위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피해자들은 “검찰 등에 체납금 등을 내야 한다”는 얘기에 반신반의했지만 전화번호가 대검찰청 등 공공기관의 대표 번호라는 점을 믿고 돈을 송금했다. 보이스피싱 조직도 “정말 검찰청 맞아요?” 하는 피해자들의 질문에 “의심 가시면 번호를 확인해 보세요”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는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돈을 받고 발신번호를 바꾸는 서비스를 알선해 준 혐의(사기방조 등)로 이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21일 밝혔다. 이씨를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에 발신번호 변조 서비스를 제공한 국내 통신업자 유모(47)씨 등 6명은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조사 결과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은 대검찰청 대표 번호를 비롯해 국내 공공기관과 은행 등 금융회사 전화번호를 255개나 도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8월 한 달에만 145명에게서 모두 20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피해자 수는 8월 한 달간 전국의 보이스피싱 피해자 736명의 20%에 달한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와 같은 인터넷 전화 설치 사업은 비교적 작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어 유사 업체가 난립하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경쟁이 과열되면서 쉽게 수익을 내기 위해 범죄 조직과 연계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또 이런 업체들을 통해 발신 번호가 변조된 경우 회선을 임대해 준 기간통신업체는 변조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범죄와 관련된 전화 회선을 차단하지 못한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에서 걸려 온 인터넷 전화는 발신번호를 변조하더라도 일단 ‘국제전화입니다’와 같은 안내 메시지가 뜨도록 통신업체에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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