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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시간, 그림은 공간 … 시공을 느끼려 붓 잡았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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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호 12면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를 지향합니다. 음식에서나 그림에서나.”
‘방랑식객’ 산당 임지호(사진). 우리 산천을 누비며 발견한 자연의 재료들로 ‘생명을 살리는 요리’를 추구한다. 내년 1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요리축제 ‘마드리드 퓨전’에 한국 공동대표로 초빙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이번에 그림 전시회(서울 인사동 리서울갤러리 11월 5~29일)를 열었다. ‘영혼의 쉼터가 되는 그림’이라고 했다.

화폭을 요리하는 ‘방랑식객’ 임지호

4년 전 입문 이후 네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그는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세계의 명산과 생명의 근원, 심장 소리, 성장과 전설 등을 담은 추상표현주의 평면회화 15점을 내놓았다. 그간 요리에서 발휘해 왔던 색채와 조형성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캔버스에서는 꿈틀대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요리에 반해 전시장을 찾았다는 관람객들에게 그는 최근 펴낸 저서에 즉흥적인 그림사인을 해주는 퍼포먼스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는 왜 그림을 그릴까? ‘요리 철학자’로도 유명한 그는 세계인에게 한식을 알리는 자리에서 어떤 철학을 논할까?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태풍의 눈 속 고요를 직접 경험해 봤다는 그는 수행을 통한 참선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고요함을 최고의 가치로 꼽았다. 8일 오후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요리사다.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작업을 하는 이유는.
“4년 전 싱가포르 오차드 거리를 혼자 거닐다 밤의 어둠을 밝히는 루미나리에의 화려한 은빛이 주는 영감에 대지의 포용력을 느꼈다. 그 느낌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림은 내적인 잔존을 끌어내는 작업이고,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이 된다. 삶이란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이 곧 삶이며, 내 삶인 음식도 지극히 시간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림은 시간을 초월해 공간 안에 있다. 시간과 공간, 어느 한쪽에 머무르는 것이 아쉬워서 둘 다 하려는 것이다.”

임지호씨가 요리한 호박잎 곰취찜. [문학동네 제공]

-요리 작업과 그림 작업이 맞물려 있나?
“모든 사물에는 고유의 파장이 있다. 내가 그린 3000점의 드로잉 중 400점이 음식 드로잉인데, 식재료에서 느낀 파장을 드로잉한 뒤 그것을 요리로 만들곤 한다. 사람에게도 파장이 있고 음식의 파장, 그림의 파장과 사람의 파장이 잘 맞아야 한다. 정제된 그림, 정제된 음식이어야 사람의 영혼을 해치지 않는다.”

-작품 성향이 주로 표현주의적인 추상작업 같다.
“구상도 해보고 다양하게 해봤지만 자유롭고 편하면서도 굉장한 절제력을 요하는 데 추상의 매력이 있다. 어차피 그림은 영혼의 쉼터니까, 과연 내 그림 앞에 사람들이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림 앞에 사람들을 붙들어 심미적인 교감을 하고 싶은 거다. 부족하지만 영혼이 들어가 쉴 만한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유명하고 비싼 그림이라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청정함이 깃들 때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다. 물에 맞는 고기가 와야겠지만.”

-12세 때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며 요리를 배웠고 미술 또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꼬리표가 중요한 한국에서 흔치 않은 경우다.
“진화하기 위해 꼬리를 잘라버렸다. 정말 큰 수행의 척도는 솔로냐 여부다. 혼자 고독 속에 있을 때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정말 좋은 샘에서 물을 떠먹는 것과 같다. 운집해 있으면 진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된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여기 벽이 보이나? 그러면 꿈이 보일 수 있게 씨를 뿌리고 배려하면서 소중히 가꿔야 한다. 어느새 벽이 사라지고 꿈만 보일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자기를 사랑하는 게 시작이요 완성이다. 내가 있으니 세상도 있다. 세상에 나만 한 보석이 어디 있나. 솔로는 외로울 거라고 하지만 정신세계만 있다면 나아갈 수 있다.”

-내년 1월 마드리드 퓨전에 참가하게 됐다. 분자요리 등 최첨단 과학요리들이 판치는 가운데 어떤 요리를 선보일 건가.
“우리나라의 자연을 보여줄 거다. 분자요리는 기계의 노예일 뿐이다. 자연을 능가하는 첨단이 어디 있나. 자연 그 자체의 평화를 추구할 뿐이다. 최고의 셰프니 뭐니 하는 것도 웃기는 거다. 무슨 기준으로 최고를 정하나. 욕심이 문제다. 나는 의식주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요리를 시작했고, 점차 그 자체를 즐기게 된 거다. 뭐든 그저 좋아서 순리에 따라 할 때 환희에 도달하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모던 한식은 어떤가.
‘문화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현상이고, 뭐든지 접목해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의에 있어 전통과 새것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조화가 깨지면 어정쩡해진다. 요즘은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깥을 보고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 우리 음식은 창의성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디자인의 진화가 필요하지만, 현상과 내면이 잘 어울리게 고안해야 한다.”

-한식 세계화가 화두인데, 우리 음식의 우수성과 경쟁력은 어디 있다고 보나.
“‘세계화’란 말에는 어폐가 있고 공유의 개념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장, 발효음식은 우주적 교감을 전달하는 영혼을 위한 음식이다. 장을 담그는 행위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에 비유될 만큼 정성과 애정을 다하는 역사와 전설을 포괄한 행위다. 기다림의 음식이자 그리움의 음식인 우리 장아찌는 계속 진화하다가 스스로 정지한다. 서양의 피클처럼 식초, 설탕이라는 정해진 맛의 틀 속에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망가뜨리지 않는 지혜를 담고 있다. 그런 역사와 전설이 스토리텔링이 되어야 한다.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우선되어야겠지만.”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음식이란 어떤 것일까.
“대영박물관의 달항아리를 보라. 주변의 온통 컬러풀하고 조각으로 화려한 것들 사이에서 완전히 비워진, 그 자체로 메디테이션을 제공한다. 무에서 유로, 다시 무로 가는 것, 고요함과 움직임의 공존이 곧 우리 문화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고요한 강물의 작은 돛단배처럼 정지해 있는 듯 일렁이는 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은 그렇게 가야 한다. 음식 가지고 정치하는 것도 아니고 떠들썩하게 서두를 일은 아니다. 일본도 100년 넘게 걸린 일이다. 우리도 이미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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