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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월요인터뷰] 74세 신성일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 마치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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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영화배우 신성일의 얼굴은 선이 뚜렷한 코와 불타는 듯한 눈으로 자유인과 로맨티시스트의 혼합된 이미지를 풍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폭풍인생’ 신성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개월에 걸쳐 자전 라이프 스토리 ‘청춘은 맨발이다’를 본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128화에 연재한 영화배우 신성일(74)씨의 마지막 한마디는 소박했다. 중·장년층 남성의 로망으로 연일 화제를 모은 그의 삶과 사랑 증언은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일종의 만화경으로 평가받았다. “매일 신선한 회를 떠 독자에게 올리듯 구술했다”는 그는 “좋은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끝낸 기분”이라며 홀가분해했다.

-민감한 소재가 많다 보니 아는 분들에게 연락이 꽤 왔겠어요.

 “작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신씨가 전화를 하더니 ‘형, 아슬아슬하게 재미있어’ 하더군요. 가수 조영남의 옛 매니저가 ‘무릎 꿇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나와 그쪽의 기억이 다소 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래저래 여러 번 등장한 여배우들한테 항의전화가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정작 한 통도 없어요. 시종일관 사실에 근거해 명확하게 썼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죠.”

 -제일 불만이 컸을 분이 아내 엄앵란씨였을 텐데….

 “엄앵란이 참 영리한 선배죠. 한국 영화계 남녀 간판 스타로 살면서 이만큼 해온 건 그와 내가 ‘동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도 서울 동부이촌동 한 동네에서 1㎞ 떨어진 다른 아파트에 각기 살며 아침저녁 밥도 먹고 여행도 가지만 애정 문제 등에선 각자의 스타일을 존중하며 깍듯하게 대접하죠. 평균수명이 길어진 우리 현실에서 미래의 부부상을 일찌감치 실천한 셈이랄까요.”

“수십 년 발꿈치 들고 뛰었다” 스튜디오에 사진 촬영을 온 신성일씨가 양말을 벗자 흉측하게 튀어나온 엄지발가락이 드러났다. 흔히 하이힐을 오래 신은 여성에게 나타나는 ‘무지외반증’이다. 신씨는 “수십 년 발꿈치를 들고 뛰었더니 양쪽 엄지발가락 쪽 뼈가 바깥쪽으로 휘어 기형이 됐다”고 했다. ‘청춘은 맨발이다’란 제목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날렵한 신발을 못 신는 대신 건강을 선택한 그는 요즘도 ‘무섭게’ 운동한다. 술·담배 안 하고 매일 달리기와 아령으로 몸을 만들기에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젊은 놈들 하
나도 안 무섭다”고 큰소리친다.

 신씨는 서울과 대구 아파트, 경북 영천에 지은 한옥을 오가며 자유인으로 산다. 서울에 올라오면 주로 엄앵란씨 집에서 식사를 하고, 대구에 내려가면 직접 장을 봐서 잡곡밥을 지어 먹는다. 독서광이고, 틈틈이 붓을 들어 글씨를 쓰며, 때로 좋은 벗들과 여행을 떠난다. 풍산개 7마리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곳저곳에 불려가 강연을 많이 하는데 객석에서 청중의 반응을 살펴주는 이는 신씨의 50대 애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와의 인연도 화제였는데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나왔을 때 맨발 벗고 도왔던 건 우리 부부가 박 전 대통령 부부에게 받은 사랑 덕이었죠. 하지만 유세 기간 내내 혈육 저리 가랄 정도로 뛴 저와 밥 한 끼 안 먹고, 유세장에 찾아온 동생 근영에게 차갑게 대하는 걸 보고 그 결벽증에 놀랐습니다. ‘아, 찬바람 부는 여인이구나’ 하고요.”

 -김종필 전 총리와 이후락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콩고물 발언’ 진상,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의 각별한 관계도 많은 이들 입에 올랐습니다.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다 털어내 시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 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는 거죠. 그 바람에 우리 사회에 인물이나 사실(史實)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과대 포장되거나 과소 평가되고 있는 인물, 사건에 대해 이 기회를 빌려 바로잡고자 했어요.”

 -137회 연재 중 어느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의 회고를 읽으면서 소름이 쫙 끼쳤어요. 1980년 광주, 이어지는 어두운 시절의 회상은 30여 년이 흘렀어도 되새기다 보면 가슴이 미어지네요.”

 10월 20일치 ‘광주 민주화운동’ 편에 그는 “또 군인이다. 우리나라가 진짜 잘못 돌아가고 있다”며 이렇게 돌아봤다. “광주 충장로와 금남로를 찾아가 현지인들에게 당시의 참상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수소문해 보니, (80년 5월 당시) 내게 전화한 여인은 그 충격으로 수녀가 됐다고 한다. (…) 사람이 총칼에 죽어가는 마당에, 영화 발전은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신성일 영화도 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요.

 “이만희 감독이죠. 그 형은 천재였어요. 너무 일찍 죽어 통탄할 뿐입니다. 그가 몇 년이라도 더 살았다면 한국 영화사가 달라졌을 겁니다. 그의 뒤를 이은 하길종 감독도 요절했으니 추억은 아쉬움으로만 달리는 모양입니다.”

 -정치판에 입문한 뒤 위기도 많았는데 헤쳐나간 뚝심은 어디서 왔습니까.

 “일찌감치 톱스타로 일가를 이뤘기에 젊은 시절부터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대상과는 타협이란 없었죠. 내가 이만큼 된 게 다 남 덕이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엄격하되 남을 배려하자’가 생활 신념이었죠.”

 -그 연세에 그만한 체력과 기억력, 몸매를 유지하시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앵란이가 나랑 결혼을 결심하고 나서 고백하길 제 승모근에 반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촬영을 하며 내가 웃통을 벗는데 등줄기 좌우 삼각형 근육선이 팽팽하더라나요. 전 옥살이를 할 때도 제 몸을 철저하게 관리했습니다. 지치면 망합니다. 체력이 있어야 정신이 삽니다.”

 그는 배우가 정면 얼굴보다 측면 모습이 더 잘생겨야 생명이 긴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카메라가 인물을 잡을 때 옆선의 실루엣이 좋아야 화면이 산다는 것이다. 그 옆얼굴의 핵심은 코인데 자신의 코는 백만 불짜리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신문 지면에 다 못 쓴 뒷얘기가 있을 텐데요.

 “12월께 이 연재물에 살을 붙인 단행본이 문학세계사에서 나옵니다. 엄앵란씨가 추천사를 써주겠다고 해서 기대 만발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고(故) 김영애와의 사랑 이야기를 밀봉한 미공개 사진과 함께 다 털어놓을 작정입니다. 지금도 그와의 짧은 나날을 떠올리면 눈물이 납니다. 그런 사랑, 그런 헌신이 지금의 저를 심장이 쿵쾅거리는 사내로 살아 있게 하는 거겠죠.”

정재숙 기자

주연작 506편, 상대 여배우 118명

1937년 대구시에서 태어났다. 경북 중·고교,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60~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간판 남자배우로 영화사에 남을 많은 기록을 세웠다. 주연한 영화가 506편, 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가 118명에 달한다. 그가 스타덤에 오른 64년 작 ‘맨발의 청춘’은 당시로서는 대기록인 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대구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본지에 지난 4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128화-청춘은 맨발이다’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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