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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되고 트로트가 되고...새롭게 탄생한 소월,박두진의 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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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호 10면

1970년대 초반 포크의 시대를 거치면서 시를 가사로 노래를 작곡하는 발상은 다소 범상한 발상이 되었다. 이들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중·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손바닥 맞으면서 수많은 시를 달달 외우고 시험 치른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소월 시를 이렇게 트로트 정서와 붙여놓는 시도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소월, 그거 사실 따지고 보면 통속적 트로트와 뭐가 다르랴’ 하는 배짱이 생긴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4> 가요 흐름 바꾼 캠퍼스 밴드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 이 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 이 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 가을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때에 / 외로운 맘에 그래도 잠 못 이루리”(희자매<사진>의 ‘실버들’, 1978, 김소월 작시, 안치행 작곡)

이때의 인순이를 기억하는가? 희자매는 진한 화장에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다소 ‘업소 분위기’ 나는 3인조 여성 그룹이었다. 지금 들어봐도 세 명 중 인순이는 탁월한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트로트 선율에 반짝이 드레스인데도, 웬걸, 김소월의 시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쉽게 저무는 봄의 실버들에서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은 1년의 흐름인 동시에 일생의 흐름이기도 하다. 실버들도 ‘한갓되이’ 늙고 ‘이 내 몸’도 늙어간다. 이 깊디깊은 절망과 질긴 체념의 태도가 여리면서도 질기게 흔들리는 실버들의 이미지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의 변신은 일취월장이었다. 김소월이나 박두진 시가 록과 결합하고 있었다.
“1.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 철없던 시절에 들었노라 / 만수산을 떠나간 그 내 님을 / 오늘날 만날 수 있다면 / (후렴) 고락에 겨운 내 입술로 / 모든 얘기 할 수도 있지만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2.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 그 무슨 뜻인 줄 알았으랴 / 제석산 붙는 불이 그 내 님의 /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 (후렴)”(활주로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1978, 김소월 작시, 지덕엽 작곡)

“(상략) / 해야 떠라 해야 떠라 / 말갛게 해야 솟아라 /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 애띤 얼굴 솟아라 / 눈물 같은 골짜기에 / 서러운 달빛은 싫어라 / 아무도 없는 뜰에 / 달밤이 나는 싫어라 / (하략)”(마그마의 ‘해야’, 1980, 박두진 작시, 조하문 작곡)
털털한 배철수 목소리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는 78년 해변가요제 인기상, 맑은 조하문 목소리의 ‘해야’는 80년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작이다. 77년부터 시작된 대학생 가요제들은 패기만만한 록밴드들을 쏟아냈다. 이전의 로커들이 밤무대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직업인들인 것에 비해 이들은 대학에서 결성된 이른바 캠퍼스밴드로 이름에서부터 자신의 학교 정체성을 드러냈다. ‘활주로’는 항공대 밴드, ‘마그마’는 연세대 지질학과 밴드였다. 작명 감각이 정말 순진하고 귀엽다.

노래로 만들기 가장 쉬운 김소월은, 록의 가사가 되는 것에서도 선두에 섰다. 이제 김소월로는 못할 게 없었다. 트로트도 되고 록도 되는 게 김소월 시였다. 여기에 노래로 만들기 다소 난감한 박두진의 ‘해’까지도 노래가 되었다. 이 시기 대학생 가요제들을 보면, 시를 가사로 쓰거나 민족주의적 소재를 쓴 작품이 의외로 많다. 록이 날라리 젊은이들의 퇴폐적 음악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기성세대에게, 유명 시인의 시, ‘탈춤’ ‘불놀이’ 같은 한국적 소재를 담은 록을 들이미는 것은 확실히 점수를 딸 수 있는 요소였다.

이에 비해 1980년대 민중가요에서 시의 노래화 경향은 훨씬 더 강했다.
“1.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 어두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 신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 (후렴)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작시, 작곡자 미상)
작곡자는 연세대 학생이었다는데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82년 즈음부터 급속히 퍼진 이 노래는, 구전 과정에서 양성우 시와 무관한 후렴이 붙었고, 1절의 ‘이 새벽’도 ‘신새벽’이라는 김지하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절절한 노래를 원하던 대학생들은 이렇게 시를 이용하여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 80년대까지 김지하·김남주·신경림·김준태·박노해 등 수많은 시인의 작품들이 노래로 불렸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 선 채로 기다리기에 세월이 너무 길다 /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김원중의 ‘직녀에게’, 1985, 문병란 작시, 박문옥 작곡)
대학가요제 수상자 김원중의 80년대 후반 대표곡이 된 이 노래를 들으면 잘 만들어진 가사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흔한 이별노래인 듯하지만 ‘오작교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나야 한다고 의지적으로 노래하는 이 범상치 않은 힘은, 대중가요계에서 스스로 나오기는 힘든 것이다. 그 범상치 않음이, 이 노래를 단순한 사랑노래가 아니라 거대한 힘에 가로막힌 애절한 이별과 그 극복의 노래로 의미 지운다. 이런 새로운 의미를 품고 싶어, 노래는 시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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