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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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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이웃한 국가를 이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니까. 구세대 특유의 맹목적인 반일감정에서 벗어나 우리의 젊은 세대가 성숙해지는 한 증표라고도 생각됩니다.

저도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류. 그의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 책이름만으로도 어떤 정신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제목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랄까? 훨씬 도발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복적입니다. 게다가 감각적이기까지 하죠.

우리 나라에는 비슷한 이름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루키는 류에 비한다면 그저 재미있는 대중작가일 뿐입니다. 물론 하루키의 경우, 그를 유명하게 만든 〈노르웨이의 숲〉같은 장편 말고, 다른 몇몇 단편에서 독창적인 재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작가는 우리에게도 흔합니다. 윤대녕이나 배수아, 초기의 전경린이나 김영하 그리고 심상대가 그보다 못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하루키를 두고 호들갑인지...

그저 상이한 두 나라에 있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의 우연한 겹침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거기에다 문학적 품격을 만들어주려고 아우성이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는 다르죠. 그는 말 그대로,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가'입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는 예술가죠.

며칠 전에 그의 신작 에세이〈사랑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들〉을 읽었습니다.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권력을 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신비화된 맹목적인 관습의 외피를 뚫고서 맨얼굴의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그의 일관된 성향이 '사랑'이라는 가장 평범한 주제를 어떻게 어루만질까? 그런 호기심으로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거기 33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남편한테 완전히 기대고 있는 주부보다 매춘부 쪽을 나는 좋아한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의 모든 얌전한 여자들한테 죽도록 매를 맞을 이야기죠.

그런데 사실 그런 얌전한 여자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다른 여자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기도 합니다. 그러니 꼭 얌전한 것도 아닐 겁니다. 어쨌거나 위에 적은 류의 발언의 묘미는 사실 그 얌전한 여자들을 그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려 애쓴다는 것입니다.

사랑. 누구나 다 사랑을 원합니다. 마치 그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소녀들의 생리나 소년들의 몽정처럼 말이죠. 그래서 사랑을 위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사람은 당연히 적습니다. 왜일까? 사랑을 그저 한갓 감정의 발산 정도로 생각하는 탓이겠죠. 게다가 자신의 고독을 달래려는 대용물, 고독을 잊으려는 도피처쯤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그 고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가려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들을 무릅쓰고 성사된 세기의 로맨스도 대부분은 환멸로 끝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사랑을 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 사랑을 끝까지 가져갈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사랑이 타인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고독을 지우려는 마약으로 존재하는 한 그 사랑은 절대 완성되지 않습니다.

고독은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입니다. 근대시민사회 속의 인간은 자유를 얻는 대신 고독에 갇혔습니다. 르네상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종교와 세속 권력의 울타리를 깨부순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평등합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는 순간 누구도 우리를 품어줄 수가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신(神)이나 왕(王)이 여전히 그 역할을 했겠지만. 연애라는 것이 19세기에 유럽에서 태어난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민사회의 평등의식이 연애의 기초가 된 것이죠.

그 전에는 이성을 만나는 일이란 그저 신이나 왕이 정해준 운명이었겠죠. 우리의 조상도 그 신이나 왕의 대리인이라고 해야 할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산 역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무조건 따라야 할 어떤 규범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으나, 현대의 우리만큼 고독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보다 상위의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정말 평등한가요? 그렇지 않죠. 아직도 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녀의 차별입니다. 외면적으로는 평등하다고 세뇌하면서, 안으로는 식민지를 만드는 것. 그것이 아직도 엄연한 남녀관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남자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사실은 매달리고,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실은 소유하려 합니다.

류는 '한국어판 서문'에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연애란 강요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애를 하는 두 사람은 각기 자립되어 있고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자립이란 경제적인 것이며, 경제적으로 자립되어 있지 못하면 정신적인 자립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정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여자들에게 평등한 취업 기회를 보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의사가 없는 여성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연애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녀평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면 그 또한 모두 연애에 있어 무자격자들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집안에 유폐시키려는 남자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의 등에 들러붙어 결과적으로 기생하는 여자들, 그들 모두가 다 평등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자고 썼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의 욕망에 늘 귀를 기울이고 따르면서도, 동시에 그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그래서 우선 스스로 자립적인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이 그런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애와 사랑에 있어 누가 누구의 식민자가 되는 한 양쪽 모두에게 실패입니다. 자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사랑이란 매춘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닌 척까지 하는 더 나쁜 매춘. 그러니 연애를 한다면 우선 '더치 페이'부터 시작하십시오. 결혼을 했다면 상대방의 은행구좌와 재산정도에 대해 관심을 끊으세요.

물론 여기서 자립이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목표는 정신적인 독립이죠.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무감(無感)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말이죠.

사랑은 없음을 지향하는 있음입니다. 아니 없음과 함께 가는, 늘 없음으로써 오히려 존재하는, 현대인의 특이한 그리고 용기 있는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고독에 치를 떨면서도 결코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진실입니다.

그러니 무라카미 류의 이 책의 일본어판 원제목처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연애"는 사실 연애가 아닙니다. 일종의 허위의식이자 자기기만입니다. 그 낭만적 사랑의 구질구질한 환상이 깨진 지점에서 현대의 고독과 자유라는 날개를 단 이카루스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추락의 순간에도 그 누구를 탓하지 않는 무감(無感)의 사랑이.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지 않고, 그 능력은 많은 노력과 대가를 치르고 난 뒤에야 얻어집니다. 하지만 매춘의 주인공이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고통스런 노력이 당연히 훨씬 더 값진 것. 다행스럽게도 선택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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