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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밀려드는 일속에 갇혀버렸다”

중앙일보

입력

광고판의 비키니 차림 여인이 남성용 잡지를 선전하며 내게 그윽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거기 적힌 문구다. ‘일이 끝나고 인생이 시작된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4개월 전 종교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신생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뉴스위크를 그만 둔 이래 내게는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다 아예 사라지고 있다. 내가 디지털 혁명에 뛰어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원한다면 집에서 일할 수도 있겠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원치 않을 때도 집에서 일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新경제 시대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 신생기업은 혼란스럽고 무자비한 데다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일 자체를 따라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곳에서 적용될 수 있는 고정 규칙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입사할 때 맡기로 한 업무가 실제 업무와 다르거나 그 업무만 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편집자로 채용됐지만 현재 그 외에 교열과 정보 확인, 데이터 입력까지 맡고 있다.

둘째, 보통 사업 아이디어가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든 정해진 절차라는 게 거의 없다.

셋째, 일이 끝나지 않는다. 인쇄 매체와 달리 웹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돼야 하기 때문에 마감은 물론 결론의 개념까지 없애 버린다.

나만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다. 통근 열차에서 랩톱 컴퓨터를 올려놓고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기술은 ‘직장’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지난해 애커먼 가족 연구소는 온라인 간통이나 새 하드웨어 구입에 따른 다툼,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호출기나 팩스·휴대폰 등 기술 때문에 파경에 이른 부부를 상대로 치료 과정을 개설했다.

이 현대의 기적들은 어떤 면에선 자유를 가져다 주지만 사람들을 일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우리 집 컴퓨터는 전자우편만 집으로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사무실 자체를 집안으로 옮겨다 준다. 직장에서 컴퓨터를 끄고 귀가해 아이들을 재우고 나도 아직 다 못한 업무량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 아내가 잠들자마자 나는 무의식중에 컴퓨터를 켜고 온라인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최근 열흘의 휴가를 받았지만 그중 30시간을 사무실 동료와 채팅하며 보냈다. 바로 그 경험 때문에 나는 집과 일을 떼놓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컴퓨터를 꺼라. 배우자와 상의해 일정 시각이 지나면 일에서 손을 떼거나 적어도 휴식 시간을 갖자고 약속하라. 그 시각 이후엔 전자우편이나 음성우편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점을 직장 동료들에게 주지시키라.

예약을 해두라. 배우자나 애인과 같이 지내기 위해 날짜나 시간 약속을 정하고 그대로 지켜라. 외출을 하든, 집에 있든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를 구하고 돈도 미리 지불하라. 독신이라면 비싼 오페라 티켓을 사거나 고급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해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약속을 지키도록 만들어라.

얼마전 나는 아내에게 오랜 친구들과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해뒀다. 갈 시간이 가까워 오자 “아내에겐 친구들과 만난다고 해두고 사무실에서 일해야겠다”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컴퓨터를 단호하게 꺼버리고 술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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